대성(大晟)스님. 벽안(碧眼)의 현각(玄覺)스님이 미국 하버드대를 떠나 서울 화계사로 향한 것처럼 그도 한국 최고 엘리트의 길을 버리고 전남 순천 송광사로 출가했다.
속명은 옥영보(玉泳寶·41). 서울대 법대 77학번. 사법고시 24회에 합격,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변호사 자격도 획득했다. 일찍이 대학시절부터 존재에 대한 의문에 빠져들었다. 부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지못해 고시를 봤고 막상 변호사가 됐으나 군법무관을 마친 뒤 개업은 하지 않고 89년 홀연히 ‘진아(眞我)’의 길을 찾아 떠났다. 절에도 가본적이 없고 중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전생의 인연’처럼 불교에 입문했다.
그가 불가에서 10여년 수행 끝에 최근 세상에 내보인 것은 뜻밖에도 20세기 인도의 힌두교 성자 마하르쉬의 가르침을 우리 글로 옮긴 번역서. ‘마하르쉬의 복음’과 ‘바가반의 말씀을 따른 삶’ 등 2권의 책이다. 올해중으로 그는 모두 10권의 마하르쉬 번역서를 쏟아낼 계획이다.
마하르쉬의 가르침은 불교보다는 힌두교 전통에 속한다. 대성스님은 그러나 “힌두교 베단타의 비이원론(非二元論)을 계승한 마하르쉬의 가르침은 선(禪)불교의 핵심사상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그가 출가를 결심한 계기를 추적하다보면 출가전인 87년 지산스님이 국내에 처음 번역한 마하르쉬의 책 ‘나는 누구인가’를 읽었을 때의 진한 감동을 만날 수 있다.
마하르쉬는 1879년 인도의 중산층 브라만 가정에서 출생했다. 종교적 가르침을 받은 바 없음에도 17세에 진리를 깨닫고 남(南)인도의 성산(聖山) 아루나찰라로 출가했다. 이곳 아쉬람에서 ‘육체도 마음도 아닌 진정한 나(眞我)가 있으며 자기탐구의 참선수행(參禪修行)을 해본 사람은 어느 순간 이를 경험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마하르쉬는 서구에 가장 많은 저서가 번역된 성자중 하나다.
마하르쉬를 만나기전 속인(俗人) 옥영보는 세속의 철학을 섭렵했다.
가전 그를 사법고시 24회 동기인 정종섭(鄭宗燮)서울대 법대교수, 채동욱(蔡東旭)부산지검 부장검사, 신기남(辛基南)민주당 의원 등과 함께 ‘칼 포퍼 4인방’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의원은 “칼 포퍼는 당시 위르겐 하버마스와 함께 사회철학의 두 축이었다”며 “사법연수원 시절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열린 사회와 그 적들’과 같은 포퍼의 원서를 읽고 함께 술을 마시며 토론한 날들이 눈에 생생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포퍼의 철학도 그를 잡아두지 못했다. 그는 결국 서양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89년 출가후 지금까지 10년넘게 수행을 하면서 마하르쉬와 관련된 책을 읽고 이해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94년 조계종의 종단개혁운동때 전국승려대회에서 변호사 출신이라는 이유로 기획업무를 맡아 일한 것을 빼고는 사실상 은둔생활을 계속해왔다.
하지만 서서히 마하르쉬의 가르침을 널리 알려야 할 때가 됐다고 판단한 것일까. 대성스님은 한 신도의 도움으로 98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집을 얻어 기거하며 ‘자기탐구회’라는 모임을 시작했다. 첫 마하르쉬 번역서인 ‘진아여여(眞我如如)’를 내고 법보시, 즉 비매품으로 나눠줬다. 올해부터는 경제적 측면에서 법보시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 ‘탐구사’라는 출판법인을 등록하고 일반 서적의 형태로 출판을 시작했다.
“달을 봐야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왜자꾸 보는가.”
대성스님은 책 출판을 계기로 인터뷰룰 하자는 요청을 한사코 거절했다. 출가자에게 과거의 행적은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마하르쉬의 가르침이 자신의 허명(虛名)에 숨어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같은 대학 법과대학 후배라는 변변치 않은 인연을 핑계로 집까지 찾아간 기자를 잠시 만나주기는 했지만 사진촬영만은 한사코 거부했다.
▼대성스님 약력▼
59년 경남 거제 출생
77년 마산고등학교 졸업
82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
82년 사법고시 24회 합격
84년 사법연수원 수료
88년 군법무관 제대
89년 순천 송광사로 출가
92년 비구계(比丘戒) 수지
<송평인기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