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상회담을 마친 후 4개 항목을 골자로 하는 남북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이를 발표했다. ①남북간 화해 및 통일 ②긴장완화와 평화정착 ③이산가족 상봉 ④경제 사회 문화교류 및 협력.
우리는 한때 선언의 시대를 살았다. 수도 없이 쏟아지는 선언, 선언. 수많은 민주화 선언을 거쳐 독재정권의 전환점을 가져 온 6·29선언까지. 이 때의 선언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끼리, 또는 권력자가 만인을 증인으로 하여 자신의 입장과 의지를 일방적으로 밝히는 것이었다. 이런 일방적 선언에 필요한 것은 사실상 ‘결단’뿐이다.
그러나 대립적 이해관계나 사고방식을 가진 둘 이상의 주체가 공동선언을 한다는 것은 그 사이에 대립된 의견을 조율하기 위한 대화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서로간의 이질성을 한정하고 공통분모를 최대화함으로써 앞으로 논의 진전을 위한 새로운 출발점을 마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동안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7·4남북 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등이 지금까지도 통일논의의 출발점이 돼 온 것은 그 때문이고, 이번 공동선언이 갖는 의미도 마찬가지다. 공동선언은 논의의 끝이 아니라 장차 논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출발점의 확인이다.
세상의 변화가 기존 가치관의 변화를 앞서갈 때 사람들은 기존 사회의 사고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 대화를 통해 해결점을 찾아간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이 각광을 받은 것은 상대적으로 변화의 시대에 범람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반이성주의 덕분이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의사소통행위의 합리성은 기득권을 상징하는 돈과 권력 등 탈언어적 의사소통 매개체의 침투와 맞서며 토론의 장을 넓혀 나간다. 그리고 이 토론의 장에서 의견을 좁혀가며 합의를 만들어가는 한편 이성에 의해 배제된 타자의 관점에서 비판이 가능하도록 의사소통의 장을 열어 둔다.
물론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근거한 토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맹자는 담론의 일부를 왜곡하며 한 쪽으로 몰고가 상대의 폐부를 찌르며 상대가 당황해 하는 모습에 쾌재를 부른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진리(道)와 정의(義)라는 대의명분에 근거해, 사적인 이익에 매몰된 범인들보다 적어도 한 발 이상 멀리 볼 수 있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맹자 역시 왕도정치와 정전제(井田制)에 근거한 이상사회론을 선언한다. 그의 선언은 도의(道義)라는 거대한 공동선(善)에 기반하기에 이기심에 가득찬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그의 도의나 성선설과 같은 근본원리는 대화의 대상의 아니다. 그것은 신념과 믿음의 영역이고 대화의 골간은 이 영역으로부터 연역된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이성 또는 합리성 역시 논의의 전제다. 아무리 개방적 대화를 주장하는 사람에게도 그의 존재를 규정짓는 전제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토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전제로부터 비롯되는 연역의 연쇄가 포괄하는 범위는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대화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 연역의 고리를 일단 피해 주변의 문제들로 토의를 제한하며 이 연역의 연쇄가 주변의 ‘사실’과 모순됨이 저절로 드러나게 하는 방법을 택한다. 대화의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지속적 대화를 위해 일부러 피해 온 문제를 굳이 ‘출발점’인 선언과 연결시키려 하지 않는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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