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찬〓KAIST홈페이지를 보니 화려한 경력에 그림과 음악에도 재능이 있어 친구나 후배들이 부럽다, 기죽는다는 등의 글을 올려 놓았더군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2월에 받은 학위논문의 성과인 것 같네요. 이 논문은 세계 최대의 컴퓨터관련협회인 ACM(Association for Computing Machinery)이 주최한 학회 ‘Agent 2000’에서 1년에 딱 한 명에게 주는 ‘최우수 학생 논문상’을 받았던데요. 인간이 프로그래밍한 대로 캐릭터가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스스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간다는 내용이더군요.
윤송이〓종래에는 좀더 생명체에 가까운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복잡한 논리연산을 더 빠르게 하고 그 용량을 더 크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춰 왔어요. 그런데 그것을 논리연산으로 하나하나 프로그래밍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예요. 생명체와 닮은 것을 만들려 한다면 진짜 생명체를 보고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논리연산 외에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하는 다른 방법으로 감성에 주목했지요.
김〓그렇다면 서구의 근대적 이성중심주의는 무너지는 겁니까? 최근 서양에서는 이성에 기반한 근대문명이 많은 문제점을 낳으면서 상대적으로 감성과 정서를 중시했던 동양의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의식보다 훨씬 큰 무의식의 영역을 탐구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윤박사의 연구는 이런 인문학의 추세를 자연과학의 ‘주류’에서 실증해 주는 셈이군요.
윤〓뇌의 진화단계를 보면 호흡 순환 반사 감성 등을 담당하는 뇌가 먼저 생겨나고 논리 연산 추론을 담당하는 대뇌피질은 나중에 만들어져요. 그 뇌의 진화흔적은 현재 인간의 뇌에 그대로 남아서 작용하지요. 지금까지 인공지능과 컴퓨터 연구가 이 대뇌피질의 역할을 본받으려 한 것이었던 데 반해, 저는 그 전 단계 뇌의 역할에 주목한 겁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심신이론(mind-body theory)과 관계돼요. 이전에는 정신과 육체가 나뉘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은 육체의 역량에 따라 발전에 제한을 받지요. 논리연산기능만 발전시킨다고 캐릭터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예요. 동물을 보면 근육의 구조나 뼈의 연결 등에 따라 환경에 반응하고 그것이 정신의 영역에도 영향을 주지요.
김〓동양에서도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지 않아요. 육체도 리(理)라는 원리와 기(氣)라는 질료로 구성되고 정신이나 심리작용 역시 리와 기가 어떤 식으로 결합하는가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지요. 조선시대 내내 논쟁했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나 인성물성론(人性物性論), 심론(心論) 등이 모두 이런 정신 심리 작용을 리와 기로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것이었죠. 이 때 정신과 육체의 작용원리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아요.
윤〓그건 몰랐네요. 동양과 유사점이 자꾸 발견되는군요.
김〓그렇다면 창조자인 인간이 디지털 캐릭터에 부여하는 선천성과 그 외의 후천성은 무엇을 기준으로 구분될까요? 어떤 요소를 선천적으로 부여할 것인가는 그 캐릭터를 규정짓는 중요한 요소일 텐데요. 사람의 본성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논쟁은 아직도 진행중인 문제죠. 이성을 인간의 선천성으로 인정하는가 하면, 마르크스처럼 선천성을 부정하는 경우도 있지요. 유교에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도덕성을 선천성으로 설정합니다. 윤박사는 인간의 캐릭터를 만들 때 기본적으로 어떤 요소를 부여합니까?
윤〓물론 선천적 능력(nature)과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nurture)은 구분해요. 그러나 제가 한 것은 그렇게 독립적으로 학습하고 대응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드는 패러다임일 뿐이예요. 그 안에 어떤 본성을 부여하는 것이 타당할지는 인문사회과학자들과 논의를 해야 할 겁니다.
김〓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새로운 형식의 생명체를 창조하겠다는 것인데 서구의 기독교적 창조론과는 부딪히지 않았나요? 더구나 윤박사는 가톨릭신자라고 들었습니다. 창조자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의 입장에서라면 오히려 설명이 쉬워요. 그야말로 무(無)의 상태에서 타인과 환경에 대응하면서 업보와 인연을 쌓아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것이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이지요. 이런 설명방식은 윤박사의 캐릭터가 성장하고 진화하는 데 그대로 적용해도 무리가 없지요.
윤〓하느님은 일정한 테두리(boundary)를 정해 주신다고 생각해요. 모든 걸 하나하나 관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제가 캐릭터에 부여하는 것도 그런 정도의 테두리를 본성(nature)으로 부여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제에게 새로운 캐릭터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는 능력과 그 정도의 테두리를 마련해 주신 것도 하느님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종교가 논리적 이해의 영역 밖에 있다는 점일 거예요.
김〓이신론(理神論·deism)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실제로 이 기술의 발전단계는 어느 정도죠? 실제로 생명체와 유사한 디지털 캐릭터를 만들 수 있는 건가요?
윤〓로봇공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MIT AI(인공지능) 랩의 로드니 브룩스소장의 팀이 만든 대표적 로봇에 저희팀이 만든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행동판단, 감성의 구현에 성공했어요. 그리고 저는 지금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만들고 있어요. 햄릿이라는 인물뿐만 아니라 여러 등장인물, 조명, 음악 등이 모두 캐릭터예요. 이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거지요.
김〓디지털 세계에서는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조차 무너지는군요. 무궁무진한 얘기가 기대됩니다.
▼단어정리▼
■지각/행동판단/액션/감성
윤박사가 만드는 디지털 생명은 지능을 가진 주체로서 네 가지 요소를 가지고 대상과 상호작용을 하며 자신의 캐릭터를스스로 만들어 간다. 필요한 정보를 선별해 받아들이는 ‘지각’,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입력된 정보를 분석 판단하는 ‘행동판단’, 행위를 구체화하는 ‘액션’, 그리고 전 분야에 걸쳐 알맞은 행위 및 학습의 동기를 부여하는 ‘감성’이 그것이다. 특이한 점은 ‘논리적 이성’이 아닌 ‘감성’이 전체를 총괄한다는 것이다.
■심신이론(mind-body theory)
인간의 마음(정신)과 몸(육체)이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작용하는가는 다루는 이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음과 몸을 형상과 질료라는 요소로 나누어 설명했고 데카르트는 둘로 완전히 구분하되 뇌안에 ‘송과선’이라는 가상의 연결선을 설정했다. 이에 근거해 서양에서는 심신이원론이 주류를 이뤘지만 끊임없이논란돼 왔다.
■이신론(理神論·deism)
신이 자연과 자연의 법칙을 창조했으나 자연과 역사에서 생기는 일에는 세세하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이론. 특히 신이 초자연적으로 계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성적 종교를 지향했던 계몽주의시대에각광을 받았다.
▼김형찬▼
고려대 국문과, 철학과 졸업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자곡서당)한문연구과정 수료
철학박사(고려대 한국철학)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 Post-Doc
현 동아일보 학술전문기자
▼윤송이▼
서울과학고 2년만에 졸업
과학기술원(KAIST)3년6개월만에 졸업
이학박사(미국MIT, 컴퓨터 신경과학)
현 한국매킨지사 경영컨설턴트
SBS드라마 '카이스트'중 혜성(이나영분)의 실제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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