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인 이화여대 이어령 석좌교수가 ‘첫’ 문학이론서를 펴냈다. 민음사가 펴낸 ‘공간의 기호학’. 청마 유치환의 시 599편 전부를 훑으며 작품이 갖고 있는 텍스트의 공간기호론적 의미를 탐색한다.
의아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수많은 평론과 저서로 낯익은 그가 첫 이론서라니…. 저자는 “지금까지의 책은 에세이와 작품비평이 전부였다. 이 책을 시작으로 앞으로는 연구와 이론 정립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붓겠다”고 밝혔다.
왜 청마인가. 이교수는 청마가 어느 시인보다 일관되게 시 속에서 안과 밖, 위와 아래 등 공간의 대립과 입체적 구조를 통해 서로 다른 의미단위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는 가장 널리 읽히는 시 ‘깃발’을 대표적 예로 들었다. 거의 모든 비평가들이 깃발의 의미를 작가의 생애와 연관시켜 풀이하거나, 태극기 인공기 등 특정한 깃발에 얽힌 역사적 의미로 환원해 풀어보려 했지만, 청마 ‘깃발’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 얽히지 않은 개념으로서의 ‘깃발의 속성 자체’를 노래하고 있다는 것. 그는 청마의 ‘깃발’이 ‘땅에 있으면서도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중간적 영역에 존재하는 사물’을 노래함으로써 수직적 초월을 향해 발돋움하는 존재의 ‘노스탤지어’를 노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연하게도 청마와는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청마를 모른다는 점이, 오히려 전기적 비평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어요.”
그와 청마의 인연은 단 하나. 청마의 사위인 김성욱씨가 그와 비슷한 시기에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김씨와의 친분 덕에 청마가 써내려간 변형되지 않은 시 텍스트 거의 전부를 구할 수 있었다고 이교수는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는 “책 자체보다도 이 책이 만들어준 계기가 내게는 더 소중하다”고 말했다. 그는 평소 “창작적이고 논쟁적인 글은 젊은 시절에, 심도있는 연구는 말년에”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이 책은 그의 저술활동에 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뜨거운 화제를 만들어내는 책은 젊은 세대가 맡아야지요. 앞으로는 수사학 은유론 이상(李箱)연구 등 관심을 가져온 문학적 주제들을 차례로 연구서로 발간할 계획입니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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