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여러 변주가 기묘하고 우습기 그지 없다. 당대에 명성을 날리던 작곡가들, 즉 쇼팽, 바그너, 구노, 요한 시트라우스, 베르디… 등의 작곡 스타일을 따서 같은 멜로디를 변주한 것이다. 대학시절 음악감상서클에 신입생이 들어오면 이 음반을 틀어놓고 “자, 이번 변주는 누구를 흉내낸 것일까요?”라며 퀴즈를 냈던 기억이 난다.
만약에 독자 자신이 오크스에 의해 패러디된 작곡가중 한사람이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인기 작곡가의 대열에 끼었으니 감격스럽다고 할까. 그런데 꼭 기분좋은 일만은 아닌 듯 싶다. 누구나 자기 스타일을 모방해서 작품을 쓸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이 “저건 누구 스타일이구나!”하고 알아맞출 수 있다면, 자기 작품에 새로운 정보가 없다는 뜻이 아닐까. 정형화된 스타일을 다시 깨고 나가지 않는 한, 그 작곡가는 벽에 다다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행히도, 오크스가 패러디한 작곡가들이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다. 각 작곡가가 갖고 있는 일반적 개성의 ‘핵심’을 끄집어내는 것은 너무도 어려웠기에, 오크스는 작곡가들의 특정한 작품 하나 또는 가장 장기를 발휘했던 장르 하나씩을 따서 흉내를 냈던 것이다. 베르디의 경우 초기 오페라의 행진곡, 바그너의 경우 ‘로엔그린’중 백조의 동기, 브람스는 ‘자장가’, 쇼팽은 마주르카 춤곡이 패러디됐다.
음악미학자들은 대작곡가들의 생애가 대부분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의 갈등 속에서 조화를 찾아나가고자 하는 노력의 여정이라고 설명한다. 익숙한 것 만을 반복 확대재생산하는 작곡가는 결국 “지겹다, 따분하다”는 비난속에 퇴장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전혀 새로운 것을 선보인다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공격을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이중의 투쟁이었다. 선배 작곡가들과 자신의 작품 사이에 차별성을 두어야 했고, 자신의 작품 속에서도 이전작품과 새 작품의 변별성이 없어서는 안되었지만 청중과 비평가의 ‘이해 범위’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20세기 초,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비롯한 전위음악 옹호자들은 “낭만주의 음악이 더 이상 새로운 요소를 자체의 구조속에 끌어들일 수 없는 굳어진 체제가 되었으므로, 전혀 새로운 음악어법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완전히 새롭지 않은 것이라면 조금도 새로울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의 소리혁명은 성공을 거둔 듯했다.
런데 오늘날 작곡가들은 ‘익숙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청중들의 비난에 시달린다. 작곡자마다 전혀 다른 음악문법을 들고 나오는 바람에 청중과 의사소통의 통로가 단절되었다는 얘기다. 그래서일까, 70년대 이후 장단조 조성(調性)과 전통적 리듬의 회복이 현대음악계에도 하나의 대세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최근에는 예술의 진화를 ‘엔트로피’적 시각에서 분석하는 관점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기존 질서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의 수립을 열역학적 흐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엔트로피가 0이라면, 즉 변화가 없다면, 그 예술양식은 결국 내부의 동인에 의해 급격히 바뀌게 된다. 반대로 엔트로피가 너무 크면, 즉 변화가 너무 급격하면, 역작용이 일어나거나 틀 자체가 깨져버리게 된다는 논리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