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삼윤의 문명과 디자인]반가사유상과 생각하는 사람

  • 입력 2000년 7월 2일 21시 22분


“나는 이제까지 철학자로서 인간존재의 최고로 완성된 표징으로서 여러 모델을 접해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 신(神)들의 조상(彫像)도 보았고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뛰어난 조상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아직 완전히 초극되지 않은 지상적, 인간적인 잔재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고류지(廣隆寺)의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에는 실로 완전히 완성된 인간실존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모든 시간적인 것과 어떠한 형태의 속박을 초월해서 도달한 인간존재의 가장 청정한,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까지 몇 십 년 동안 철학자로 살아왔지만 이만큼 인간의 실존을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진실되게 구현한 예술품을 이제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이처럼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일본 교토(京都) 고류지의 목조 미륵반가사유상.

내가 그것이 표현하려 한 깊은 뜻을 나름대로 알아차린 것은 고류지에서 실물을 보고도 몇 년이 지난 뒤 서양문명이 태어난 에게바다를 여행하면서였다. 그때 날마다 갑판 위 또는 해변의 자갈밭에서 반라(半裸)의 벌거숭이들이 몸을 태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잘 빚어진 육체 눈요기에 바빴다. 남녀를 가릴 것 없이 탄력 있고 균형 잡힌 몸매였다. 순간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서 보았던, 미로의 ‘비너스 상’을 떠올리며 저런 자랑스런 육체를 가졌기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반라에다 역동적인 근육을 가진 인체조각들을 남겼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리적 힘 숭상해온 서구인▼

지중해성 기후탓도 있겠지만 고대 올림픽 제전경기에 참가하는 선수와 관중이 모두 벌거숭이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리스인, 나아가 지중해 주변의 유럽인이 인간을 어떻게 봤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몸과 마음은 독립돼 있는 것으로 믿었다.

나폴레옹의 유해가 안치돼 있고 황금 돔이 화려한 파리의 ‘앵발리드’ 가까이에 로댕의 걸작들을 모아놓은 로댕미술관이 있다. 미술관 앞뜰에는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Thinker)’이 방문객의 인사를 받는다.

내가 놀란 것은 작품 ‘생각하는 사람’이 제목과는 달리 울퉁불퉁한 근육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턱을 괴고 있는 손가락도 투박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것이었다. 마치 싸움에 임한 포세이돈이나 지구를 들어올리고 있는 아틀라스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어찌 생각에 잠긴 자의 모습이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어쩌겠는가. 생각을 하든, 또 무엇을 하건 그것이 버릴 수 없는 그들의 신체적 조건인 것을.

2000년 가까운 세월을 격하고 있는 데도 로댕의 작품 밑바탕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체취가 묻어나고 있었다. 서구인들은 이렇게 줄곧 육체(physical body)와 물리적 힘을 숭상해 왔다. 그들은 육체가 즐거워 할 것들을 찾는데 많은 시간을 바쳐 왔다.

동양인들은 육체를 드러내는데 인색했다. 동양미술사 전반을 살펴보더라도 인체를 묘사한 작품은 부처상을 제외한다면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다. 육체에 별다른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공자나 유교 이전부터 이런 전통은 확립되어 있었다.

불교도들도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군을 따라 밀려온 그리스인들을 만나기 이전에는 불상이란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리스인들의 인체조각을 보면서 불상의 시원적 형태인 간다라 불상을 탄생시켰다. 파키스탄 서북부, 옛 간다라 땅인 스와트(Swat)의 부하라 절터에서 본, 머리는 떨어져 나갔으나 몸통만 남아있는 작은 석제 불상이나 나중에 제작된 것으로 페사와르박물관에 있는 금동제 간다라불상들은 몸매나 인체의 선 등에선 전형적인 그리스식 인체조각기법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태어난 땅만큼은 속일 수 없었던지 근육의 표현에선 운동선수처럼 역동적이기보다는 오랫동안 수행한 사람의 그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이었다.

▼동과 서의 만남 간다라 미술▼

간다라 불상은 태생상 고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데다 그곳 역시 더운 지역이라 옷을 살짝 걸친 형상으로 표현돼 있다. 상체의 상당부분이 노출되어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데 중국 한국 일본과 같은 사계절이 뚜렷한 동북아의 불상도 간다라의 전통에 따라 상체를 거의 다 드러내고 있다. 고류지의 미륵반가사유상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의 인체조각이나 ‘생각하는 사람’과는 달리 허리 가슴 팔 목 어느 한군데도 역동성이나 물리적 힘을 느끼게 하지는 않는다. 몸매의 선은 그대로 드러나지만 근육다운 근육이 표현되어 있지 않아 가냘픈 몸매, 섬세한 손, 앳띤 얼굴, 그리고 엷은 미소만 눈에 띄어 사유하는 자의 특이한 조용함만 배어날 뿐이다.

반가사유란 석가모니가 태자시절 씨뿌리는 것을 보다가 보습에 찍혀 나오는 벌레를 새가 잡아먹는 모습에서 약육강식이란 현실세계의 고통을 깨닫고 깊이 명상에 잠겼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 그 모습을 조형화 한 반가사유상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쪽 발을 접어 올려 반대편 무릎에 올려놓고는 한 팔을 턱을 괴어 명상에 잠기는 반가사유의 자세는 실제로 취하려 들면 쉽지 않다. 유연하게 살짝 꺾여 올라가는 오른팔과 미묘한 곡선을 그리는 섬세한 손가락이 현실을 반영한 것은 아닐지라도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내적 긴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눈을 내리 감고 잔잔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얼굴, 즉 상호(相好)를 들여다보면 어느새 한없는 유열(愉悅)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의 극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명상에 잠긴 구도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되는가를 몸소 보여주는 이 목조불상은 비록 신체라는 물질을 표현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죽어도 없어지지 않을 정신을 담기 위해서였지, 신체 그것을 표현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심신의 합일을 표현한 불상▼

몸을 드러내기를 꺼렸을 뿐 아니라 육신을 버릴 때 비로소 해탈할 수 있다며 육신마저도 불에 태워 자연속에 뿌렸던 동양인들에게 육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몸이란 말을 즐겨 쓰긴 했지만 서양사람들처럼 신체(corps 또는 physical body)만이 아니라 신체와 마음이 합쳐진, 또는 그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 그 무엇을 뜻했던 것이다.

21세기에는 육체와 그것이 상징하는 물리적 힘보다는 비전과 창의력, 삶의 질과 같은 정신적 가치가 주목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고류지의 목조 미륵 반가사유상 뿐만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보살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 등 수준 높은 반가사유상을 빚어낸 우리 민족으로서는 장기를 한껏 펼쳐 보일 수 있지 않겠는가.

권삼윤(문명비평가)tumi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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