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수련법회에 참석한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방을 나서 대적광전으로 향한다.
목탁소리가 그치자 누각에서 법고를 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법고에 이어 장중한 범종 소리가 서른 세 번 울려퍼지고 목어(木魚)와 운판(雲版) 두드리는 소리가 물고기와 새를 깨운다.
새벽 예불이 시작된다. 하안거(夏安居)에 들어간 스님들의 모습이 법당 앞쪽에 아른거린다. 청아한 목탁소리에 실려 낭랑한 천수경 독경소리가 법당 가득히 퍼진다. 참회의 108배를 올린다. 온몸이 땀에 젖지만 마음은 상쾌하다.
멀리 동이 터온다. 보경당에 앉아 참선을 한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을 체험해보고 싶지만 부질없는 생각만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사라진다. 졸음이 온다. 눈이 저절로 감긴다.
딱딱 따다닥. 해오스님이 죽비를 내리 치는 소리에 후다닥 잠이 달아난다. 앉아 있는 것이 보통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반가부좌한 다리가 저려온다. 차라리 절을 했으면 좋겠다. 이제 화두(話頭)고 잡념이고 다 사라지고 다리 아픈 것만 일념이 된다. 수련회 사흘째인 어제까지 170명의 수련생중 약 20명이 중도탈퇴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산사에서 선승과 함께 차 한 잔 하듯 며칠 보내려 했는데 새벽예불이니 좌선이니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바깥에서 새 소리가 들린다. 우주 삼라만상이 생각나고 엉뚱하게 TV CF에 나온 원성스님이 떠오른다. 그래 잡념을 떨치려는 것,그 자체가 또 다른 무명(無明)인지 모른다. 수년 아니 수십년에 걸친 수행자의 마음자리를 어찌 하루 이틀의 수행으로 느낄 수 있으랴. 차라리 마음 가는 대로 그냥 놔둘 것을….
식사는 발우공양(鉢盂供養)이다. 발우는 나무나 놋쇠로 대접처럼 만든 그릇. 가사 한 벌과 발우 하나면 스님들은 이 세상 어디든지 간다. 밥과 찬을 더는 동안 합장하고 기다린다. 식사를 하기전에 김치쪽을 국에 잘 행궈서 발우 한쪽에 붙여둔다. 음식은 등을 꼿꼿이 하고 발우를 들어 입을 가리고 먹는다. 씹거나 빨아먹는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한다. 밥알 하나 남겨서도 안된다. 식사가 끝나면 숭늉을 받아 발우 한쪽에 붙여둔 김치쪽으로 발우 국그릇 반찬그릇을 차례로 씻어낸 뒤 반찬 그릇의 숭늉을 마신다. 마지막에 미리 받아 놓은 청수(淸水)로 그릇을 행구는데 이때 고춧가루 하나도 나와서는 안된다. 청수는 처음 그대로 갓난아이가 먹어도 될 정도로 깨끗해야 한다.
공양을 마친후 해우소(解憂所)를 찾는다. 누군가 이렇게 써놓았다. ‘화장실에 들어가 편안히 앉아서/왼손으로 뒷물을 하면서/손을 씻으면서/더러움을 몽땅 버리고/내몸 이제 청정신이 되었네.’
수련회의 절정에 해당하는 1080배를 올리는 시간. 죽비 한번에 절 한번. 절 한번에 염주 한알. 108 염주가 10번을 돌아야 1080배다. 염주 한번 다 돌기도 전에 벌써 사방에서 거친 숨소리가 몰아친다. 땀이 비오듯 쏟아져 눈앞을 가린다.
누군가가 염불하듯 관세음보살을 부른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한 관세음보살이여 우리의 연약한 육신을 도우소서. 몇배쯤 했을까. 이제 가늠할 수도 없다. 한 여인이 절을 하다 쓰러져 운다. 왜 울까. 누가 절을 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힘들면 밖으로 나가면 그만인데…. 그러나 나와의 약속인데, 내안의 불심(佛心)과의 약속인데 그럴 수는 없는 법. 힘이 부쳐 더 이상 죽비소리에 맞춰 절을 할 수가 없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마음으로만 절을 하는 경우가 잦다.
맨앞에서 죽비를 치며 염주알을 세며 함께 절을 올린 두 스님도 가사 장삼이 땀으로 범벅이 됐다. 목탁소리와 석가모니불을 외는 염불소리가 1080배의 끝을 알린다. 하지만 사방에는 미처 채우지 못한 1080배를 마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 많다. 무슨 원(願)을 세웠길래 저리 간절한 것일까.
밤 10시, 산사 도량이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 묵언(默言). 서로 말을 해서는 안되는 게 이곳의 규칙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해온 말조차 자신의 안으로 깊이 침잠하기 위해서는 때로 자제해야 할 삿된 습(習)인지도 모른다. 산사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조용히 깊어간다.
<합천(해인사)〓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수련회참가 '碧眼여성' 마르티네스
7월 1일부터 5일까지 열린 제2차 해인사 여름 수련법회에는 벽안(碧眼)의 젊은 여성이 눈길을 끌었다. 에스테르 마르티네스.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으로 우리나라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강사로 일하고 있다.
―어떻게 산사 수련회까지 오게 됐나.
“부산에 살고 있는 한국인 친구가 외국인인 나도 절에 들어가 볼 수 있다고 해서 놀랐다. 절에 들어가면 불교를 보다 직접적으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친구가 날 대신해서 수련회 참가를 신청해주고 또 날 여기까지 데려다줬다.”
―평소에 불교에 관심이 많은가.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 관심이 있다. 불교신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교를 보다 잘 이해하고 싶다. 내 가족은 스페인의 일반인처럼 가톨릭 신자다. 나는 성당에 나가 미사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넓은 의미의 그리스도인이다.”
―수련회에 참가한 소감은….
“불자들의 행동하는 방식이나 느끼는 방식이 아주 색달랐다. 좋은 경험이었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좌선하는 것이 힘들지 않았나.
“힘은 들었지만 보람이 있었다.”
―1080배는 제대로 했나.
“절하는 것이 익숙치 않아 매우 힘들었다. 노력은 했지만 남들보다 쉬는 시간이 많았다. ”
―한국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나.
“그렇지 않다. 아주 좋았다. 한국 음식을 좋아해 먹는 것도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김치를 좋아하는 데 이곳에서 먹는 김치는 양념이 부족해 별로 맛이 없었다.”
―한국에 온지는 얼마나 됐나.
“2년 됐다. 부산에서 1년반 살았고 지금은 서울에서 6개월째 살고 있다. 부산에서는 부경대(옛 수산대)에서, 서울에서는 군인들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있다.”
―나이는….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