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5대 임금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1623). 패륜아 폭군 등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부정적이다. 이 책은 광해군에게 짙게 드리운 편견을 걷어내고 그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조명하고자 한다.
광해군은 애초부터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첩의 몸에서 태어난데다 그것도 맏이 아닌 둘째였기에. 그러나 임진왜란의 와중에 아버지 선조가 서둘러 왕세자를 정함으로써 엉겁결에 왕세자가 됐다. 유약한 선조 대신 전투를 지휘하며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다.
그러나 이복동생 영창군이 태어나면서 상황이 심상치않게 돌아갔다. 영창군 주변에 그를 옹립하려는 세력들이 생겨났다. 게다가 선조가 마음을 바꿀 지도 모를 일이었다. 두려움 속에서 17년간의 세자 생활을 버텨내고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안으로는 민생 회복과 국가 재건을 위해 힘썼고 밖으로는 명 청 교체기 열강의 압력을 극복해야 했다.
그러나 당쟁은 심화했고 영창군 측근에 의해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광해군의 측근들은 영창군을 없애버리자고 했다. 광해군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창군은 끝내 살해됐고 인목대비는 유폐됐다. 광해군의 의지라기보다는 측근들의 의지였다. 졸지에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내쫓은 패륜아로 몰린 광해군.
왕위에 오른지 16년째 되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인조는 광해군의 조카다. 광해군은 자신이 완공시킨 창덕궁 담을 넘어 도망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쿠데타 직후 아들과 며느리는 자살했고 부인은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은 이곳저곳을 떠돌며 귀양생활을 하다 쓸쓸히 눈을 감았다. 이후 후대의 역사는 그를 혼군(混君·어리석은 임금) 폐주(廢主·쫓겨난 임금)라 불렀다.
저자는 그러나 이같은 평가의 상당 부분이 편견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광해군은 대동법을 실시하고 ‘동의보감’을 반포하는 등 피폐한 민생을 어루만지고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광해군의 외교력. 조선 군주중 주변국의 동향과 정세를 가장 정확히 파악한 인물이 광해군이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후금(후의 청나라)과 몰락의 길을 가고 있는 명. 광해군은 그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쳤다. 저자는 ‘후금을 다독이고 명을 주물렀던’ 그의 능력 덕분에 임란 직후의 위기를 잘 넘겼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광해군의 반대세력과 후대의 역사는 광해군이 명과의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 후금과 손 잡았다고 비판했다. 쿠데타 세력의 광해군 축출 명분도 이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하나의 사료를 제시한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초고 한 부분. 이 원고엔 붉은 줄이 죽죽 그어져 있다. ‘광해군이 후금과 손을 잡은 것이 아니다’ 등과 같이 광해군에게 유리한 대목을 없앤 것이다. 실록 편찬자들은 이 대목을 빼고 실록 완성본을 작성했다. 이것이 바로 의도적인 광해군 평가절하의 한 예라고 저자는 말한다.
광해군의 극적인 삶과 당시의 시대상을 역동적으로 그려낸 역사서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