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출판통신/도쿄에서]메도르마

  • 입력 2000년 7월 14일 18시 39분


키나와현은 큐슈에서 남쪽으로 약 500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이다. 일본 내에서 한국의 남북정상회담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곳이 바로 오키나와였는데, 왜냐하면 주한미군의 거취가 오키나와에 즉각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국토의 0.6%에 지나지 않는 오키나와에 일본내 미군 시설의 25%가 모여 있다.

오키나와가 일본의 일부가 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15세기 이래 오키나와에는 통일 류큐(琉球) 왕국이 있어서 동아시아 해양무역 네트워크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에도 시대에는 큐슈의 사츠마항이 오키나와를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있기는 했지만, 류큐 왕국은 중국과 조공관계를 유지하는 등 독자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에 들어 일본은 류큐 왕국을 쳐부수고 강제로 오키나와를 일본 영토에 병합시키고 말았다. 말하자면 오키나와는 근대 일본이 처음으로 획득한 식민지인 셈이다. 일본의 수중에 들어 간 오키나와는, 다른 식민지가 그랬듯이, 일본의 가혹한 동화정책에 시달려야 했다. 학교에서는 오키나와 말 사용이 금지됐고 오키나와 말을 썼을 경우에는, 저 악명높은 ‘호겐후다(方言札)’라는 것을 목에 걸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참했던 것은 태평양전쟁 말기의 오키나와전이었다.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미군의 총공격으로 섬 전체가 초토화된 것으로 비극은 그치지 않았다. 오키나와 말을 쓰는 남자들은 간첩 혐의로 일본군의 손에 죽어 갔고, 여자와 어린이들은 집단 자결을 강요당했다. 그리하여 90일 남짓한 전투에서 12만명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일본의 패전 후 오키나와는 미군에 점령당해 미국 동아시아 전략의 중요거점이 된다.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에 ‘반환’되지만, 미군 기지는 점령 당시 그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키나와에 주목해야 할 문학가가 탄생했다. 메도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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