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 仁宗 때(1123년) 고려에 왔던 宋나라의 使臣에 徐兢(서긍)이라는 이가 있다. 도읍 開京(현 開城)에서 약 한 달간 머물면서 자신의 見聞을 책으로 담아 高麗圖經(고려도경)이라는 이름으로 편찬했다. ‘圖經’은 그림과 함께 설명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당시의 사회상이 잘 묘사되어 있어 우리에게 중요한 史料가 되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고려시대 남녀관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결혼 전의 男女간에는 그다지 區別이 없었으며 함께 衣冠을 벗고 강에서 沐浴을 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叔姪(숙질)간의 혼인도 성행했는데 高麗 제4대 光宗이 조카였던 慶和宮 夫人과 結婚했던 것이 좋은 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儒家의 性理學이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으면서 이런 사회상은 일변하고 만다. 고려 중엽에 도입된 朱子學은 宋儒(송유)들의 男尊女卑(남존여비)관념을 업고 이 땅에 들어와 三綱五倫(삼강오륜)의 男女有別(남녀유별) 綱目(강목)을 내세워 여성을 閨房(규방)에 幽閉(유폐)시키고 三從之道(삼종지도)를 강요했다. 이 때부터 ‘男女七歲不同席(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여 서로가 원수를 피하듯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신체 노출을 극도로 피하여 얼굴을 부채로 가리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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