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장은 옥(玉)광산의 지하 수십m 깊이의 갱내에 마련됐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당시 수십m 지하의 갱내는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해 대국장으로서는 딱 좋았다.
서9단은 이날 대국에서 초반 장고를 거듭하며 강수로 나가 유리한 형세를 만들었으나 중반전부터 초읽기에 몰리다가 실족해 그만 불계패를 당했다. 그런데 서9단의 국후담이 걸작이었다.
"화장실이 바로 옆에만 있었어도 더 좋은 기보를 남겼을텐데…."
대국장이 갱내에 있다보니 화장실이 걸어서 10분 정도 걸어야할 정도로 멀리 있었던 것이다.
서9단은 원래 대국 중에 화장실을 자주 가는 버릇이 있다. 꼭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서9단 나름대로 긴장을 푸는 방식인 것.
특히 그때의 도전기는 이세돌 3단을 어렵게 꺾고 올라와 오랜만에 이창호 9단과 맞붙은 대국 아니던가. 밖에서는 당연히 이 9단의 승리를 점쳤지만 서 9단의 각오는 남달랐을 것이고 긴장도 다른 대국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긴장을 못풀게 되니 바둑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물론 명필이 붓을 탓할 수 없듯 승부사가 패배한 이유를 다른 것에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프로기사의 바둑을 한번 지켜본 사람이면 이런 변명 같은 이야기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하루 종일 신경의 끈을 팽팽히 조이며 바둑을 둬야하는 사람들이 갖는 초조함 긴장감 강박관념 등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이틀 걸이 바둑의 대가인 조치훈 9단은 한때 수읽기를 하면서 성냥개비를 수없이 부러뜨리는 버릇이 있었다. 이 버릇이 없어지고 난 뒤에는 갑자기 수읽기를 하다가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박아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조훈현 9단은 대국 도중 다리를 덜덜 떠는 것은 물론 일본어와 한국어가 섞인 말로 독백을 내뱉는 버릇이 있다.
나쁘게 보면 '고수들의 대국자세가 뭐 저래'하고 눈을 흘길 수도 있지만 승부사의 고통과 고독의 표출이라고 이해해달라고 하면 너무 지나친 요구일까.
승부사의 진면모를 보고 싶으면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에 와보라. 본선 대국 관전은 힘들지만 예선 대국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초읽기에 몰려 얼굴이 일그러지면서도 한수 한수에 최선을 다하는 프로기사들을 보면 '아, 승부의 길은 바로 이런 거구나'하는 느낌과 함께 저절로 존경심이 생길 것이다.
PS :세계 최강 이창호 9단의 대국 버릇은 어떨까. 정답은 '별 것 없다'이다. 이 9단은 워낙 어린 나이에 본선 도전기를 두기 시작해서인지 대국 버릇이 얌전한 편이다. 가끔 세수하러 갔다오는 것 외에는 특별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다만 이 9단이 바둑둘 때마다 꼭 갖고 다니는 물건이 있다. 손수건이다. 이 9단은 손수건을 손에 쥐고 있다가 가끔식 입과 이마 등을 가볍게 두드린다. 뭘 닦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버릇이다. 돌부처라는 별명답게 무심한 포커페이스를 가졌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다른 기사와 마찬가지로 온갖 광풍과 파도가 몰아치기 때문이 아닐까.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