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로익은 의사, 엘렌느는 사진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여인. 둘이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작품은 두 사람이 보내는 아홉 번의 밤을 사실적으로, 때로 즉물적으로, 관찰자의 거리를 유지하며 서술하는 가운데 진행된다.
남자는 의도적으로 여자를 바람맞히기도 하지만 충동이 여자 곁에서 그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여자는 관계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더 남자에게 빠져드는 것으로 관찰된다. 남자의 점퍼에 배인 체취를 깊이 들이마시는 여자의 모습이 좋은 상징이 된다. 그러나 속내는 단지 유추할 수만 있을 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가 왜 여성용 피임기구에 구멍을 뚫는지는 알 수 없다. 감기에 걸려 끙끙대는 것으로 끝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예견할 수도 없다.
작가는 냉담한 관찰을 통해 차갑고 개인주의적인 현대인의 ‘사랑’을 고발하려 했을까. 그렇지 않다. ‘차가움’은 관찰자의 서술방식일 뿐, 주인공들의 표면적 행위 이면에는 서로에게 점차 빠져드는 온기와 열기가 배어나온다. 그 양쪽의 온도차가 빚어내는 긴장이 어쩌면 이 작가의 매력일지 모른다. 독자는 두 사람의 일상을 관찰했을 뿐 아무것도 들여다보지 못한 것 같지만,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두 사람의 거의 모든 것을 이해한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작가 베른하임은 ‘100페이지 작가’로 불린다. 데뷔 후 12년동안 100페이지 남짓한, 우리식으로 말하면 중편 네편만을 선보여왔기 때문. 남자의 옷과 물건에 집착하고, 친구에게 연애상담을 하며, 남자에게 궁금증을 표현하지 않는 네 소설의 여주인공들은 마치 한 인물들인 것처럼 빼닮았다. 건조한 문체는 네 편에서 공통되지만, 메디치상 수상작인 ‘그의 여자’는 극적 반전과 유쾌한 결말이 있다는 점에서 더 친근하게 받아들여진다.
98년 ‘그의 여자’ ‘금요일 저녁’이 번역출간된데 이어, 이보다 앞서 쓰여진 ‘커플’ ‘잭나이프’가 선을 보임으로써 그의 작품 모두가 국내에 소개되게 됐다.
▼'커플'/ 엠마뉴엘 베른하임/ 이원희 옮김/ 작가정신/ 86쪽 5800원▼
<유윤종기자>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