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속으로]서하진 '라벤더 향기'

  • 입력 2000년 8월 4일 19시 09분


서하진의 ‘라벤더 향기’ (문학동네)는 그 표제에서부터 후각적 이미지에 호소하는 소설집이다. 여기에 실린 열 편의 단편을 읽고 있으면 냄새야말로 인간에게 그 자신의 비밀스런 세계를 가장 즉물적으로 열어보이는 감각임을 생각하게 된다.

서하진의 인물들은 형체가 보이고 소리가 들리는 만큼 냄새가 나는 세계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냄새를 통해 그 세계의 현실을 지각하고 이해한다. 하지만 냄새를 통해서 감지하게 되는 현실이란 얼마나 애매한 것인가. 감각적 인상 가운데 냄새만큼 언어로 표상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라벤더 향기’처럼 냄새 자체를 형용하지 못하고 그 냄새가 나는 사물의 이름을 밝혀야 하는 궁색한 어법이 예시하듯이 후각 앞에서 언어는 빈곤하다. 후각으로 다가오는 세계는 직접적이고 선정적이지만 또한 언어에 의한 표상과 통제의 범위를 벗어난다. 언어의 바깥, 따라서 문화의 바깥에 걸쳐 있는 그 세계는 언제나 모호하고, 불안하고, 음험하다.

서하진 소설에 그려진 애매하고 음험한 세계의 중심에는 수수께기 같은 인간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그 인간 세계 곳곳에 창궐하는 ‘비밀’은 사회의 공식적인 언어 또는 문화에선 허용되지 않는 욕망의 비밀이다.

서하진 소설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결혼과 가족의 내러티브 속으로 말끔하게 통일되지 않는, 오히려 그것을 어지럽히고 뒤흔드는 사랑의 욕망이다. 서하진 소설의 인물들은 사랑이 부재하는 혼인 관계에 처해 있거나 아니면 불륜의 사랑에 빠져 있다. 표제작의 젊은 주부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자와 은밀한 관계를 맺다가 괴로운 환멸에 이르고, ‘모델 하우스’의 여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사랑 속에서 체득한 사랑의 모델이 결혼에서 파탄으로 끝나는 것을 보게 되며, ‘개양귀비’의 시어머니는 가족제도가 앗아간 사랑에 대한 보상을 화초에서 구하며 살고 있다. 서하진 소설의 인물들이 저마다 비밀을 품고 있다면 거기에는 사랑의 불에 데인 자국이 남아 있다.

그러나 서하진 소설은 결혼에 대한 항소도 아니고 불륜에 대한 찬가도 아니다. 그것은 사랑을 원하는 욕망의 절실함과 불온함을 이해하고 있는 동시에 사랑의 환상 또한 간파하고 있는 소설이다. 그의 소설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친밀한 교섭에 대한 욕망이 그것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인간 관계과 사회 제도 속에서 겪게 되는 아이러니컬한 전도와 대체의 회로를 보여준다. 삶의 모호함에 감각을 열어두고 있는 작가답게 서하진은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사랑의 아이러니에 충실하다. 그 사랑의 아이러니는 그것이 빚어지는 맥락을 좀더 치밀하게 탐구했더라면 아마도 자연 가족 문화의 모순된 충동들에 휩싸여 있는 현대적 삶의 한 은유가 되었을 것이다.

서하진 소설집에 서술된 사랑의 비밀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종소리’에 등장하는 ‘숲속 여자’의 것이다. 신도시 산자락의 낡은 집에서 홀로 ‘벙어리’처럼 살고 있는 그녀는 자기 잘못으로 가족을 잃은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그녀는 생전의 남편이 새집을 지으려고 데려온 젊은 남자에게 마음이 끌려 있던 중에 그에게 겁탈을 당해 아이를 갖게 되었으며, 고통에 시달리던 남편은 화재가 일어난 사랑채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아들 또한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형벌을 받듯 남편의 기억이 남은 집을 지키고 있지만 그곳은 신도시 인근을 개발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다시 위험에 처한다. 그녀는 결국 그녀의 집이 산사태로 사라지면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녀의 집에서 들려오던 종소리는 말하자면 문명의 힘에 짓밟힌 순정한 사랑의 원성(怨聲)이다. 신도시의 시민들이 잊어버린 소리, 문명의 소음에 삼켜진 소리, 그 유린된 자연의 비가를 기억하는 것은 소설의 몫이다.

▼'라벤더 향기'/ 서하진/ 문학동네▼

황종연(문학평론가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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