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궁금증을 갖고 있다면 로마가 아니라 폼페이로 가야한다. 로마시대 지중해 연안의 여러 도시들과 교역을 하며 크게 번성했던 폼페이는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시들어버린 로마와는 달리 화산폭발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땅 속에 묻혀버렸기에 한창 때의 도시 모습은 물론 의식주 등의 생활상을 스냅사진처럼 보여주기 때문이다.>>
▲폼페이 유적지에서는 검은 돌을 우리의 장고처럼 다듬어 놓은 제분기를 볼 수 있다. 로마는 성능 좋은 제분기를 확보함으로써 대제국의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
나 또한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 로마의 테르미니 역에서 나폴리 행 열차를 탔다. 한동안 우산을 활짝 펴놓은 것 같은 이탈리아 특유의 소나무를 보여주던 열차는 꼭 2시간 반 뒤에 풍만한 가슴을 하고 있긴 하나 요염하기보다는 모성애를 자극하는 소피아 로렌의 고향인 나폴리에 닿았다. 그녀를 떠올려서인가. 나폴리는 너무나 서민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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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마인들이 빵을 주식으로 했음을 보여주는 프레스코 그림이 폼페이의 비의장 벽에 아직도 남아있다.
| ▲로마시대의 부뚜막과 취사용 기구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베티의 집'. 그 당시에도 부엌은 입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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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에서 폼페이로 가는 베수비오 순환전철은 서민적이다 못해 촌티까지 났다. 냉방이 되지 않아 창문을 있는 대로 열어놓고 달리는데, 덜커덕거리는 소리는 옆 사람과의 대화를 끊기가 일쑤고 불어오는 바람은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 놓았다. 그 와중에도 시선을 붙드는 녀석이 있었다. 서기 79년 8월 24일 불덩어리를 쉴새 없이 뿜어대며 산자락 아래의 폼페이 시를 6m 두께의 화산재로 뒤덮어버린 베수비오 산(해발 1281m)이 창문 너머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그 녀석은 ‘내가 언제 그랬어’ 하는 듯 태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가 못된 장난을 쳤기에 로마의 일상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지금 그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는 처지이기에.
◆ 의식주 등 생활유물 고스란히
‘폼페이 미스테리 역’에서부터 시작되는 드넓은 폼페이 유적이 보여주는 것은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가 들어 닥치자 어떻게든 거기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인간들이 화산재에 묻혀 그대로 굳어버린 ‘최후의 폼페이인’ 뿐만은 아니다.
바둑판처럼 짜여진 도시구조며 넓고 잘 포장된 길, 길 곳곳에 설치된 수도꼭지, 연극과 시 낭송 음악 경기시합 등이 펼쳐졌던 야외극장과 음악당과 원형경기장, 알렉산더 대왕의 ‘이수스 전투장면’ 모자이크 그림이 발견되어 유명해진 ‘목신의 집’, 집집마다 현관 바닥에 새긴 ‘개조심’이란 글자, 화려하고도 풍부한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 그림으로 주인의 부와 취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베티의 집’과 ‘비의장(秘儀莊)’, 그리고 거기에 그려진 선이 부드러우면서도 속이 드러나 보일 듯한 얇은 옷, 고급스런 가구, 먹음직스러운 과일, 귀여운 자태를 하고 있는 고양이와 오리 등 하나 하나가 그 시절의 화려하고도 풍요로운 삶의 모습을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베티의 집 근처에서 검은 돌을 우리의 장고처럼 다듬어서는 옆으로 세워놓은 것 같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밀을 빻아 가루로 만드는 제분기였는데 우리의 맷돌과는 생긴 모습이 달라 그것의 정체를 알아내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저런 제분기를 이용하여 빵을 만들어 주식(主食)으로 삼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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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분과정을 거쳐야 하는 빵은 집에서 굽기 힘들기 때문에 가게에서 사 먹어야 한다. 그래서 빵을 주식으로 한 서양에서는 상업이 일찍이 발달하게 되었다.
| ▲거대한 무논에 의존하여 살았던 밥 문화권은 도시보다 농촌에 의존했기에 기계화나 산업화에 늦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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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이시스 신전내 사제의 식탁에서 호두 대추야자 렌즈콩 등과 함께 발견돼 지금은 나폴리박물관에 옮겨진 둥근 빵과 비의장의 커다란 벽에 그려진 빵을 나르는 여인의 모습을 보았기에 그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식량을 일정한 공간 내에서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게 되면서 인류가 비로소 문명을 창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빵은 문명을 잉태케 한 최대의 공로자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이나 고대이집트인들은 보리나 밀을 빻아 빵을 주식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페니키아, 소아시아, 그리스 등을 거쳐 로마에 전해졌고 로마는 제대로 된 제분기를 발명해냄으로써 대제국의 기틀을 다져갔다. 빵의 원료가 되는 밀이나 보리는 밥의 그것인 벼보다는 훨씬 단단하여 가루로 내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는데, 로마는 성능 좋은 제분기를 확보하여 많은 사람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방앗간 장악 지배력 확보
그런데 그런 제분과정에는 벼의 탈곡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동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개인은 방앗간을 운영할 수가 없다. 오직 권력자만이 가능하다. 빵을 주식으로 하는 서양에선 물(水)을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했던 밥 문화권인 동양과는 달리 방앗간을 장악함으로써 백성들을 지배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밀가루가 아니라 빵 그 자체를 배급하거나 상인들을 통해 팔았다. 빵은 각자가 집에서 지어먹는 자급자족형 밥과는 달리 시장에서 사 먹는 상품이었던 것이다.
폼페이 시절에도 빵은 그렇게 거래되었음을 보여주는 그림(나폴리박물관 소장)이 이곳에서 발견된 바도 있으니 우리가 굳이 오후 3∼4시쯤 로마나 파리의 빵 가게 앞으로 달려가 그 모습을 확인하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된다.
◆ 기계화 진전따라 산업혁명 촉진
제분기와 운명을 같이 한 빵은 상품이 되면서 도시와 인연을 갖게 됐고 마침내 기계화와 ‘에너지혁명’으로 불리는 산업혁명까지 재촉하기에 이르렀다. 방앗간을 뜻하는 영어의 ‘밀(mill)’이 기계, 나아가 공장으로 번역되는 데서 제분 공정이 유럽의 산업발달사에서 차지한 비중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반면 거대한 무논(水田)을 거느려야 생존이 가능했던 밥 문화권은 도시보다는 농촌에 의존해야 했고 호젓한 물레방앗간 정도를 넘어서는 기계화와 산업화를 이뤄내지 못했다. 밥과 빵은 이렇게 서로가 걸어온 길이 달랐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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