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현장21]고장난 비디오 작품 버젓이 전시

  • 입력 2000년 8월 6일 19시 52분


경기도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서는 관객들 가운데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사람이 많다.

본관 중앙홀에 막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오는 작품이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의 '다다익선'.

글자 그대로 개별 작품이 화면에 나오는 비디오 모니터 1천여개가 조화를 이루면서 전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어우러지는 걸작이다.

관객들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것은 개별 작품이 화면에 나타나지 않는 모니터가 많다는 것이다.

작가가 처음부터 여백의 미를 살리기 위해 모니터에 화면이 나오지 않도록 해 뒀는지 고장이 난 것인지.

△'다다익선' 모니터 1003개 중 100개가 고장

중앙홀 '다다익선' 작품은 1003개 개별 비디오 작품으로 구성돼 있다. 높이 18.5M, 총 7단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현재 전체 모니터중 대형 24개, 중형 19개, 소형 57개의 화면이 나오지 않는다.

   
▲52개중 30개가 고장난 6단 부분     ▲22개의 모니터가 고장난 2단 부분

중앙홀에서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원형 전시실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백남준씨의 비디오 작품 'TV 물고기'와 '라디오데이'도 화면이 나오지 않는 모니터가 많다.

 
▲12개의 모니터가 고장난 5단 부분

'TV 물고기'의 경우, 5개의 모니터 가운데 2개가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라디오데이' 역시 12개의 모니터 가운데 4개가 켜지지 않는다.



▲TV물고기 <백남준.1975.국립현대미술관> 5개중 3개의 모니터만 작동

고장난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미술관측에 문의하는 관람객이 하루 수십명에 이른다. 결론은 고장난 것.

△거장 백남준을 욕되게 하는 행위

관람객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자녀들을 데리고 나온 한 관람객은 "국립미술관이 고장난 모니터를 방치하는 것은 우리시대 최고의 비디오 예술가인 백남준씨를 욕되게 하는 행위"라고 비난하면서 "그림이 찢어진 것과 다를게 없다"고 규정했다.

'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라고 밝힌 한 관람객은 "고장난 기계를 전시하는 현대미술관은 작품을 하나의 쓰레기로 전락시키는 행위를 하고 있다"며 "이것이 해당국가 미술수준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국립미술관의 모습인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 정준모 학예연구실장은 "대부분이 10년 이상된 작품들이고 하루종일 전시를 하고 있기 때문에 기계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모니터 단종으로 교체에 어려움

특히 비디오 아트 등 설치미술의 경우 "작가의 허락없이는 손 댈 수 없는 고충이 있다"고 관람객들의 이해를 당부했다.


◀데카르트<백남준.1994.국립현대미술관>  하루 3차례, 90분씩 가동을 중단한다.


미술관측은 "'TV 물고기'와 '라디오데이'는 LDP만 수리하면 정상작동할 수 있으며, 현재 수리를 맡긴 상태이므로 곧 정상작동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다다익선'의 수리문제에 대해 백남준씨와 논의한 결과 '전체를 교체할 것이 아니면 손대지 말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밝히고 "전체 모니터를 교체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후원업체와 협의를 했으나 모니터가 단종된 제품이기 때문에 전체 교체를 할 경우 작품의 틀마저 다시 만들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해 계획을 취소했다"고 설명했다.

'다다익선'이 고장나기 시작한 것은 약 1년전, 벌써 1백여개의 모니터가 망가졌다. 이런 추세라면 얼마안가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지 않을까.

왕상길 전시과 행정사무관은 "'다다익선'이 지금까지 버텨준 것도 다행이다"라며 "아직까지는 이 작품에 대한 유지에 최선을 다할 뿐 다른 계획은 세워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재 미술관측은 '다다익선'의 경우,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가동하고 있으며, 다른 비디오 작품들은 1시간 30분씩의 가동과 휴식을 반복해, 하루 총 270분을 가동하고 있다.

△30년 이상된 작품도 새 작품처럼 다시 제작


▲TV첼로<백남준.1971.호암갤러리> 

지난 21일부터 서울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에서는 '백남준의 세계'라는 이름으로 독일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백남준씨의 작품 1백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대부분 20~30년된 작품들이지만 제작년도에는 '참여TV(1963/1998작업)'처럼 두 개의 연도가 표시돼 있다. 63년 작품을 98년에 수정하여 다시 만든 것이다.

'로봇가족'의 경우에도 1986년작이지만 DVD(Digital Video Disk)로 다시 제작되어 선명한 화질과 깨끗한 외형을 유지하고 있다.

 
▲로봇가족'할아버지,할머니'<백남준.1986.호암갤러리>

미술평론가 이주헌(아트 스페이스 관장)씨는 "수많은 외국 미술관을 돌아보았어도, 고장난 비디오 아트 작품을 본 적은 없다"고 밝혔다.

이씨는 "외국 미술관이나 전시관의 경우, 비디오 아트 작품이 고장 나면 수리를 마칠 때까지 다른 작품을 대신 전시해 놓는다"며 국립현대미술관의 작품 관리 방식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돈 7백원에 시원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라서 찾았다는 관람객은 "그래도 꺼진 것 보다 켜진게 많아 다행"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최건일/동아닷컴 기자 gaegoo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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