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찜쪄먹기]할 클레멘트 '중력의 임무'

  • 입력 2000년 8월 14일 10시 46분


《지구인은 외계에 지구와 같은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 있을지를 생각해본다. 만약 지구의 환경과는 전혀 다른 외계에서 살아가는 우주인이 존재한다면…. ‘중력의 임무’에서 작가 할 클레멘트는 독특한 외계와 외계인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2차원 삶을 사는 외계인

백조자리 61번 별의 둘레를 도는 행성, 메스클린. 밀도가 크면서 납작한 쟁반 모양으로, 하루가 겨우 17분 남짓에 불과한 엄청난 속도로 자전한다. 이처럼 특이한 조건 때문에 메스클린의 환경은 지구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적도에서의 중력은 원심력 때문에 지구의 3배 정도에 지나지 않는 반면 극지방에선 무려 7백배에 달한다.

그러나 이런 혹독한 환경의 별에도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한다. 메스클린인은 지면에 착 달라붙은 납작한 외모를 소유하고, 강한 중력에 버틸 수 있도록 무척이나 단단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도 ‘높이’를 매우 두려워한다. 강력한 중력으로 인해 위치에너지가 너무 커서 불과 몇 cm 높이에서 추락해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기 때문이다. 메스클린의 무시무시한 중력은 사실상 이들을 2차원의 삶에 붙들어 매어두는 셈이다.

하지만 메스클린인은 나름대로 사회를 형성해 멀리 떨어진 다른 지방의 부족들과 왕래와 교역을 이뤄냈다. 주인공인 발리넌도 바로 메스클린의 한 무역선 선장으로서, 진취적이고 독립심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다.

어느날 발리넌의 무역선은 외계에서 날아온 우주선과 접촉한다. 발리넌은 그 안에 타고있던 외계인과도 만나는데, 그 외계인은 바로 지구인이다.

지구인은 메스클린 행성의 극지 부근에 추락해버린 무인 우주탐사선을 회수하러 온 것이었다. 그 탐사선에는 반중력장치 개발에 필요한 데이터가 저장돼 있어서, 그들은 기필코 탐사선을 회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메스클린 극지는 중력이 너무 강해 도저히 지구인은 접근할 수 없다.

찰스 래클랜드라는 지구인이 대표로 메스클린인과 대화를 진행시켜 나간다. 발리넌과 래클랜드는 점점 우정을 싹틔우게 되는데….

그러던 어느날, 마침내 래클랜드는 발리넌을 진지하게 설득시킨다. “당신네 행성의 극지는 이제껏 우리가 다녀본 우주의 그 어떤 곳보다도 중력이 강합니다. 우리는 그곳의 중력 데이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정보의 가치는 우리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에게도 매우 클 것입니다. 당신들의 과학과 문명이 획기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어요”라는 식으로…. 발리넌은 생각에 잠긴 끝에 지구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을 위해서 이 위험한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발리넌 일행은 극지로 향해 가는 여행 도중 한번도 답파한 적이 없는 미지의 영역과 혹독한 자연환경, 괴물이나 다른 적대적인 종족과의 충돌로 험난한 고생을 겪는다. 특히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이들에겐 금단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공포의 대상이지만, 지구인의 조언으로 도르래를 만들고 밧줄을 연결해 건너간다. 그러면서 발리넌은 과학의 효용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과학이 자신들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지구인 래클랜드는 이들과 동행하지만, 극지에 가까워질수록 갑옷과 같은 특수 중력감압복으로도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된다. 결국 그는 메스클린 상공의 우주선으로 올라가 무선 통신을 통해 추락한 탐사선의 위치를 발리넌 일행에게 계속 알려준다.

마침내 무인탐사선이 발견되자, 발리넌은 그 잔해를 지구인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한다. 이들 스스로 그 탐사선을 분석해 뭔가 획기적인 과학 지식을 한꺼번에 얻으려는 속셈이다. 그러나 그는 래클랜드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들이 얻으려는 과학 지식이 얼마나 방대하고 복잡한 체계인지를 깨닫는다.

발리넌은 지구인에게서 과학교육을 받기 시작하고, 한편으로는 자기들 스스로 과학적 사고방식을 키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얼마 뒤, 그들이 이제껏 타오던 배가 거대한 기구에 매달려 하늘로 떠오른다. 이제 메스클린인은 3차원 세계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어간 것이다.

◆하드 SF작가이자 과학 교사 할 클레멘트

할 클레멘트

192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섬머빌에서 태어난 할 클레멘트. 본명이 해리 클레멘트 스텀스로, 소년시절부터 열성적인 SF팬이었다. 하버드대학에서 천문학을 공부한 수재이며, 대학졸업 후 2차대전 중 항공 파일럿으로 공군에서 복무했다. 그 후 계속 고등학교 과학교사로 일하며 여가시간에 틈틈이 소설을 썼다.

1945년 6월, SF잡지 ‘어스타운딩 사이언스픽션’에 단편 ‘증거’를 발표하면서 작가로 등단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1953년에 발표한 ‘아이스월드’를 통해서다. 범죄자를 쫓아 우주인 수사관이 찾아간 혹독한 외계 행성, 지구에서 겪는 일에 대한 얘기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우주인은 무려 섭씨 4백도인 행성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지구는 그에게 혹한의 세계인 셈이다.

이처럼 외계인의 시각에서 지구를 철저하게 낯선 세계로 묘사해낸 클레멘트는 곧이어 발표한 ‘중력의 임무’로 부동의 명성을 굳히게 된다.

클레멘트는 전업작가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과학적 논리전개와 묘사를 중점으로 두는 하드SF에서 대가인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의 작가 아서 클라크를 능가한다는 찬사를 받곤 한다. 특히 해박한 과학지식을 이용해 이질적인 외계와 외계인을 설정하는데 최고라는 평가를 받으며 1950년대 기라성 같은 1급 SF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클레멘트는 SF계의 조류 변화와 쟁쟁한 후배 작가들의 등장으로 더이상 예전과 같은 명성은 누리지 못했다. 80년대에는 로버트 포워드(중성자별에 사는 지적 생명체를 묘사한 장편 ‘용의 알’의 작가) 같은 물리학이나 천문학 교수이면서 SF소설도 쓰는 사람이 늘어나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아직도 하드SF의 대가로서 그의 선구적인 위상은 변함이 없다. 과학교사라는 직업에 충실한 사람답게 고급 지적 유희로서의 하드SF 창작을 그만큼 발군의 실력으로 이룩한 사람은 유례가 없다. 그 점에서 클레멘트의 공로는 길이 기억될 것이다.

◆백조자리 행성의 모델

클레멘트가 설정한 이 작품의 무대, 메스클린 행성은 백조자리 61번 별의 둘레를 도는 천체다. 실제로 천문학자들의 관측에 따르면, 61번 별의 둘레에는 목성보다 몇십배나 무거운 행성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작가 클레멘트는 바로 이 사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나름대로 창조적인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렇게 탄생된 소설 속의 메스클린은 질량이 목성의 16배 정도이며, 표면의 중력가속도는 지구의 몇백배나 된다. 하지만 자전주기가 겨우 17분 45초에 불과해 납작한 모양이다. 이같은 설정이 매우 과학적이라는 것을 거대한 가스체인 목성을 관측해보면 알 수 있다.

목성은 지름이 지구의 11배가 넘는 반면, 자전속도는 겨우 10시간 남짓으로 지구의 절반도 안되기 때문에 약간 찌그러진 타원 모양이다. 따라서 자전 속도가 빠르면 천체의 모양이 납작해진다는 설정은 전혀 무리한 내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메스클린은 강력한 원심력 때문에 모양이 납작해져서 극지방 중력이 지구의 7백배에 달하는데 비해 적도 중력은 3배밖에 안된다는 설정도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고농도, 고압의 수소대기와 메탄으로 이뤄진 바다로 뒤덮인 메스클린은 기온이 섭씨 1백70도에 달해 지구인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이 수소대기를 호흡하며 메탄과 암모니아로 신진대사 활동을 하는 존재가 바로 메스클린인이다. 외모가 마치 가위손이 달린 지네와 비슷한 이들은 나름대로 사회와 문명을 발전시켜 왔지만 자기들의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인식은 지극히 단편적이다. 지구가 평면이어서 먼바다로 나가면 떨어져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과거 인간처럼, 메스클린인도 자신들의 행성 모양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이 작품이 발표된 뒤 독자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철저한 하드SF적 설정에 감탄과 찬사가 쏟아져 클레멘트는 순식간에 1950년대를 대표하는 SF작가로 자리매김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메스클린인의 의식구조가 너무나 지구인과 같다는 비판이나, 메스클린 행성의 물리적 설정에도 허점이 있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클레멘트는 이러한 문제를 반기는 편이었다. 그는 과학교사답게 ‘과학퍼즐처럼 생각해볼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 자체를 즐긴다.

‘중력의 임무’는 1996년에 한국어 번역판(시공사 간행)이 나왔다. 이 책에는 작가 자신이 직접 덧붙인 후기가 함께 실려 있어 하드SF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자연과학 전공자인 번역자가 독자입장에서 작품에 대해 풀어놓은 지적도 유익하다.

박상준(SF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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