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지구의 끝까지 험난한 여정을 꾸리는 소설가들, 아마도 이들이 진정한 소설가가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여행과 유랑, 방황, 현지 답사, 체류 등 자신의 근거지를 벗어나 타자의 문화와 만나는 갖가지 체험들은 소설가들의 창작 지평을 넓혀주는 소중한 양식이다.
이처럼 글쓰기 역시, 글쓰는 주체의 체험 폭과 깊이 만큼일 수 밖에 없다는 논리에서 보자면 윤정모의 작가적 여정은 새삼 돋보인다.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도 그러하지만, 소설가가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근거지로부터 탈주하여, 새로운 체험의 지평을 개간해나가는 그녀의 치열성은 작품 자체의 치열성으로 전이된다.
2년 반 전, 단지 기존의 정형화된 틀을 탈피하여 새로운 소설을 쓰기 위해서, “집도 차도 다 팔고” 영국으로 떠난 윤정모. 최근에 출간된 장편소설 ‘슬픈 아일랜드’는 바로 이러한 영국 체험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윤정모는 하필이면 마르크스의 무덤이 있는 런던 하이게이트 부근에 숙소를 정하여 2년 반 째 머무르고 있는 것일까? ‘슬픈 아일랜드’가 바로 그 답이다.
우리에게 아일랜드란 무엇일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한국 현대사와 아일랜드의 연관성은 무엇일까? 오랜 식민지 체험, 분단의 체험, 독립 운동의 체험, 민족적 정서 등등의 면에서 아일랜드는 우리와 밀접한 역사적 연관성을 맺고 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상동성에 대한 문학적 호기심이 윤정모로 하여금 이 땅에서의 모든 것들을 처분하고 런던으로 떠나게 만든 동인이 아닐까 싶다.
‘슬픈 아일랜드’는 주인공 혜나와 그녀를 둘러싼 신부 오닐, 그리고 아일랜드민족해방군(IRA) 테러리스트인 숀, 이렇게 세 사람의 만남과 독특한 우정과 사랑, 역사적 연대의 의미에 대해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는 소설이다. 패션 공부를 위해서 런던으로 떠난 혜나는 우연한 기회에 의해 인도적인 신부 오닐과 테러리스트 숀을 만난다. 오닐은 한국에서 10여년 간 선교활동을 하다가 영국으로 돌아와 집 없는 자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신부이며, 숀은 오닐의 인척이자 IRA 무장 테러리스트이다. 우연히 숀의 도움으로 성폭행의 위기를 벗어난 혜나는 그들의 존재에 의해, 아일랜드의 슬픈 역사에 눈뜨게 된다.
혜나로 하여금 역사적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모티프는 무엇보다도 숀이라는 테러리스트에 대한 묘한 인간적, 육체적 호기심이다. 그를 이해하는 과정은 아일랜드의 슬픈 역사를 이해하는 과정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한국 현대사의 슬픈 상처를 보듬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혜나가 친구의 부탁으로 일제하 임시정부시절 김구 선생님을 도왔던 아일랜드인 죠지 L 쇼 선생의 역사적 행방을 탐문하는 대목, 어느 노신사의 부탁으로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코트의 디자인을 기꺼이 담당하는 것, 그리고 테러리스트 숀의 탈출을 돕는 장면 등은 한 평범한 패션디자이너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역사와 인간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슬픈 아일랜드’는 최근 우리 소설문학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폭넓은 국제적 감각과 풍부한 역사적 인식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간혹 드러나는 불분명한 인물 설정과 작품 내적 필연성의 부족은 이러한 이색적인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권성우<문학평론가 동덕여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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