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시대의 한국 역사를 서술해보도록. ”
학생들은 의아했다.
“역사라뇨? 저희들이 쓰는 것이 어떻게 역사일 수 있습니까?”
백교수의 대답.
“물론. 여러분의 일상이나 작은 경험은 모두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누구가 역사를 쓸 수 있습니다. 이제 역사를 보는 눈을 바꿔야 합니다.”
이 책은 이렇게 탄생했다.
n세대 대학생들은 자신의 다양한 경험과 가족 이야기, 평소의 느낌 등을 통해 자신만의 시각으로 한국사를 기록했다. 사소한 것을 통해 역사를 들여다보는, 이른마 미시사(微示史)의 실천이었던 셈이다.
그들이 역사에 접근해가는 통로는 다양하고 신선하다. 여기 실린 글의 하나인 ‘교사 홍태남의 교통수단 변천사’. 이 글은 한 평범한 가장의 교통수단 변천을 보여줌으로써 거기 담긴 시대적 사회문화적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교사 홍태남은 글을 쓴 대학생의 아버지. 충북 영동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홍태남은 1973년 자전거를 처음 구입했다. 82년 80cc짜리 오토바이를 샀고 얼마 후 88cc로 바꿨다. 90년 승용차 엘란트라로 교체했고 95년엔 중고 프라이드를 한 대 더 샀다. 99년 패밀리 밴으로 , 최근엔 LPG차로 바꾸었다.
처음 자전거를 구입했을 때, 그것은 홍태남의 가정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장날이면 뒷자리에 부인을 태우고 장을 보러 가기도 했고, 주말에 아이들과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그러나 자전거가 있다는 이유로, 유신헌법의 정당성을 농촌 주민들에게 알리라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한밤에도 자전거 페달을 밟아야 했다. 자전거 한 대에 숨겨진 양면성. 평범한 글 같아 보이지만 이러한 대목에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한 공무원의 월급 봉투로 본 가족경제사’, ‘언론인 정교용의 26일간의 실종’, ‘노동자 장원기의 슬픔’, ‘경찰관 최영복 가족의 이사 이야기’, ‘내 고향 진도의 우울한 변화’ 등도 흥미롭다.
물론 전문가의 글이 아니어서 내용이 그리 깊지 않다는 것이 이 책의 피할 수 없는 약점. 그래도 이 책이 보여준 발상이나 시각은 참신하다.
하나 더. ‘휴대폰 소리로 가득찬 고독한 나라’를 쓴 한 대학생의 통찰이 많은 여운을 남긴다.
“앞이 잘 내다보이지 않는 이 현실. 누군가가 끊임없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데서 위안을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닐까.” 270쪽, 8000원.
<이광표기자>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