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풍경들이 떠오릅니다. 장대비를 맞으면서도 공연장을 끝까지 지켰던 1969년 우드스탁의 관중들, 그리고 거리에 나가 '행진'을 목청껏 부른 후 마음 맞는 벗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축복합니다'를 읊조리던 80년대 중반 서울 그 허름한 지하 술집의 청년들. 그때 들국화의 음악은 체제에 저항하는 힘이자 정신이었습니다.
가난하면서도 행복한 순간이란 짧은 법이지요. 들국화는 80년대가 가기도 전에 곧 해산했고 머리에 꽃을 꽂으며 자유와 평화를 외치던 청년들도 어느새 나이를 먹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주식투자를 하고 주택청약적금을 붓습니다.
틈틈이 들국화 멤버들의 소식을 접했지요. 선생님은 솔로음반 2장과 라이브 앨범 등을 발표하셨고 최성원 선생님 역시 '제주도의 푸른밤'이 들어 있는 1집과 '어린왕자'의 2집을 내셨구요, 주찬권 선생님도 넉 장의 앨범을 보여주셨지요. 손진태 선생님과 최구희 선생님의 음반도 밤을 새워 들었습니다. 들국화 해산 이후 발표된 선생님들의 음악도 역시 멋있고 좋았지만, '좋은 음악'일 뿐이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것만이 내 세상'의 절규도 '세계로 가는 기차'의 흥겨움도 맛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리움의 두께만큼 안타까움이 더해갔지요.
1997년 11월 20일 허성욱 선생님이 비명에 가신 뒤 들국화는 다시 모였지요. 1998년 컴백 공연에 이어 9월 2일과 3일 예술의 전당 야외극장에서 또 공연을 갖습니다. 밴드가 (재)결성 되면 공연을 갖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겠지요. 들국화는 그 동안에도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 '엉클 톰'에서 꾸준히 활동을 했습니다만, 대형공연을 시도하는 건 워밍업이 끝났기 때문이겠죠? 제가 이번 공연에 거는 바람은 이것 한 가지입니다. 청중들은 들국화를 '추억'하며 공연장으로 가겠지만, 들국화는 공연장에 모인 청중들에게 '추억'이 아닌 새로운 '힘'과 '정신'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선생님은 '시간'이라 불리우는 영악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법을 아시지 않습니까?
'전인권 라이브'(1993년)의 첫곡으로 실린 '15년 동안'이 흐르는군요. 여기에는 락에 매료되기 시작한 열아홉 살부터 서른네 살까지 선생님의 음악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15년이 흘러도 락에 대한 선생님의 열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더군요. 15년을 건너뛰어도 락은 역시 살아 꿈틀대는 정신입니다.
왼쪽에서 세번째가 '전인권' ▶
3J(지미 핸드릭스, 짐 모리슨, 제니스 조플린)의 죽음과 함께 미국의 히피 정신도 사이키델리 락도 하향곡선을 그렸습니다. 들국화의 해체 이후 90년대의 우리의 처지도 마찬가지였지요. 그후로도 꽤 많은 락 그룹들이 부침을 거듭했지만, 아직까지 들국화가 이루어놓은 높이와 깊이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들국화가 다시 대형공연을 갖는 것입니다. 20대 마리화나 자욱한 연기 속에서 극단으로 치달은 3J 너머의 세상을 들국화를 통해 엿보고 싶다면 지나친 바람일까요?
전인권 선생님!
들국화의 멤버로 노래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찾아온 청중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셔요. 거기 오래 전 첫 무대에 올라 '눈앞이 캄캄하고 기타는 보이지도 않던' 더벅머리 청년이 보이나요? 희끗희끗한 귀밑머리 감추며 멋지게 리듬을 타는 중년이 보이나요? 청년의 열망과 중년의 원숙함, 그 둘을 함께 노래하는 들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만나고 싶습니다.
들국화 4집이 기다려집니다. 21세기에도 영원할 히피들의 자유 정신을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이미 머리에 꽃을 다시 꽂을 준비를 마쳤습니다.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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