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팬무비]우월한 일본인, 자학적인 일본문화

  • 입력 2000년 9월 9일 10시 39분


기타노 다케시 감독
기타노 다케시 감독
베니스영화제가 시작됐습니다. 베니스영화제라면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생각납니다. <소나티네> 등으로 유럽에 이름을 서서히 알려가고 있었지만, <하나-비>가 1997년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함으로써 기타노 다케시는 비로소 세계에 이름을 확실히 알렸습니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도 수상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그답지 않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흘렸으니, 얼마나 감격했는지 알 만합니다.

이번에도 기타노 감독은 베니스를 찾았습니다. [BROTHER]라는 신작과 함께입니다. [BROTHER]는 지난 9월2일 공식 상영됐습니다. 기타노 감독의 '전통'을 이어받은 듯하면서도 파격적인 이 작품에 대해 당황하는 이도 없지 않았지만 반응은 대체로 '훌륭합니다'.

일본 언론 <메사게로>는 "과거 기타노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신선함은 덜하지만 기타노 작품 스타일은 그대로"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일간지 <라 스탐파>는 "지금껏 제작됐던 액션영화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물론 <라 레푸블리카>의 "재미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봐왔던 기타노 영상의 되풀이"라는 냉정한 평가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쯤되면 일본 언론에서 '난리'가 났을 법합니다. 우리같으면 그랬지 않았을까요. '우리의 기타노, 이번에도 베니스를 점령하다' '[BROTHER] 베니스 극장가 재차 대폭격!' '야쿠자 형제의 펀치에 베니스 쑥밭이 되다' 등.

이 정도야 보통이었겠지요. <춘향뎐>이 칸영화제에 출품됐을 때를 돌이켜 보십시오. 칸영화제가 무슨 세계 타이틀매치라는 되는 양 떠들어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뜻밖에 일본 언론은 조용합니다. <산케이> 신문이 "기타노 감독 신작, 베니스에서 호평받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짧게 게재했을 뿐 <요미우리>도 <아사히>도 그냥 무덤덤한 수준입니다.

왜일까요. 우리 언론이 영화제를 마치 타이틀매치라도 되는 듯 생각하는 반면, 일본 언론은 영화제를 그냥 하나의 축제로 보는 성숙한 예술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인터뷰집을 번역한 적이 있습니다. <꿈은 천재이다>라는 제목인데, 거기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이노우에 히사시라는 영화평론가가 주고 받았던 인터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일본 언론은 일본 사람이 외국에서 망신 당한 이야기는 아주 크게 싣는 반면, 외국에서 아주 잘한 일은 그리 크게 다루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맞습니다. 구로사와 감독님도 일본보다는 외국에 나가 더 대접받으시지 않습니까?" "어험, 그, 그거야 그렇지요."

이건 대체로 맞는 말 같습니다.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딸 가즈코 씨도 노상 "외국에 나가면 아버지가 얼마나 위대한 감독인지 실감하게 된다"고 말하곤 했으니까요.

게다가 구로사와 감독은 같은 일본 감독인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 같은 감독들이 외국에서 얼마나 대단한 평가를 받는지 상기시키며 이런 감독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소홀한 일본 영화계 풍토를 비판하곤 했습니다.

잘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모, 요시이, 스즈키, 사사키 선수 등과 박찬호, 김병현 선수에 대한 보도를 비교해봐도 일본 사람들의 이런 경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언론이 국내 프로야구보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에 대해 훨씬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반면 일본에서는 자국 프로 야구 중계가 우선 순위를 점합니다. 노모가 아주 잘할 때도, 사사키가 신인왕 타이틀이 유력해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럴까요. 일본 사람들은 왜 자기네들이 외국에서 잘한 짓은 (상대적으로) 쉬쉬하는 반면 못한 짓은 떠벌리는 걸까요.

이노우에 평론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뒤 그런 경향이 점점 생겨난 듯하다고 말합니다. 어딘지 모르게 자학적인 사회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것입니다.

자학이라고 말하니 여자를 밧줄로 묶어놓고 촛농을 떨어트리는 일본 특유의 사도 마조히즘 섹스가 생각나지만 이건 그것과 좀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에서 큰일을 했다 싶으면 아주 호들갑을 떠는 반면 일본 사람들은 지나치게 조용합니다. 이 둘 가운데 어느 게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느쪽도 비정상이긴 마찬가지 아닐까요.

김유준(영화칼럼리스트) yjkim@digi-c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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