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러보면 주변 곳곳이 근대건축물이다. 서울만해도 독립문(1897), 명동성당(1898), 정동교회(1898), 덕수궁 석조전(1907), 한국은행(1912), 서울역(1925), 서울시청(1925) 등. 하지만 제대로된 자료조차 없는 우리의 현실. 근대는 한국건축사 연구에 있어 하나의 공백기다. 이 책은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시도다. 저자는 한국근대건축 연구에 매진해온 김정동 목원대교수.
1876년 개항 이후, 1940∼50년대까지의 한국근대건축사를 개괄적으로 훑어보고 근대건축물을 속속들이 찾아간다. 한국 근대건축사이자 한국근대건축 견물록인 셈.
특히 남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건물을 다수 소개한다. 서울 삼청동 한국금융연수원 내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장건물 번사창(飜沙廠·1884). 신식무기를 제조했던 이 건물은 한국과 서양의 건축양식을 절충한 것이어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러시아 건축기사 사비친이 세운 덕수궁의 정관헌(靜觀軒·1900). ‘조용히 덕수궁을 바라본다’는 뜻의 이 건물은 고종의 휴게소이자 대한제국의 연회장이었다. 나무와 돌 벽돌을 섞어 지은 한양(韓洋) 절충식 건물로, 특히 기둥의 아름다운 조각이 구한말의 쓸쓸한 시대적 풍경과 어울려 묘한 정취를 자아낸다.
일제시대 이래 선교사들의 휴양지였던 충남 대천 별장촌도 흥미롭다. 이곳엔 일제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100여채의 별장이 지어졌다. 한옥풍이기도 하고 서양풍이기도 한 이들 건물은 비록 외국인이 세웠지만 주변과의 조화가 일품이다. 이 중 선교사 언더우드의 아들이 지은 해변원(海邊元)은 그 이름부터가 눈길을 끈다. 영어로는 Under Woods Haven Won. 한자 이름과 영문이 잘 어울린다. 그러나 1980년대말부터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30여채가 철거됐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근대건축물의 보존을 힘주어 강조한다. 서울은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지방의 소도시는 훼손이 심각하다. 저자는 그 대표적인 곳으로 충남 강경을 소개한다. 근대상업도시 강경에서 그 건축물들이 흔적도 없이 헐려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처럼, 대부분 철거의 명목은 일제 식민통치의 잔재이기에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러나 그것은 상황의 오명을 뒤집어 쓴 불행한 퇴장이라고 지적한다. 일제시대 치욕을 보여주는 건물이라도 함부로 철거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치욕의 역사도 소중한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건축은 역사성 공간성 시간성이 모두 함축될 때, 하나의 생명을 얻게 된다.”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 김정동 지음/ 대원사/ 320쪽, 1만2000원▼
<이광표기자>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