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류학자 헬렌 피셔는 ‘제1의 성’에서 여성이야말로 21세기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갈 주체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이미 독창적인 저서 ‘사랑의 해부’에서 사랑의 본질을 화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관점에서 파악해 생물 짝짓기 행위의 진화론적 성격을 밝혀 주목받은 바 있다. 이 책에서도 생물학적 결정론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분하는 중요한 잣대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여성이 생물학적으로도 사회경제적으로도 으뜸가는 성임을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남녀는 유목생활을 하던 ‘아득한 그 옛날’엔 평등한 관계였다. 그러나 쟁기의 발명과 더불어 인류가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제2의 성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가부장적 농경사회에서는 집중적이고 직선적인 ‘계단식 사고’를 하는 남성이 보다 유리했기 때문이다.
반면 산업혁명을 계기로 다시 경제 일선에 나서게 된 여성노동력은 그 속성상 21세기 글로벌 시장의 요구에 부합한다. 저자는 이를 여성의 ‘거미집식 사고’라 정의한다. 뛰어난 언어감각과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 인간관계에 대한 중시, 사회정의에 대한 순수한 관심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여성성이야말로 수평적 네트위크를 강조하는 오늘의 ‘하이보그(hyborg·복합형 조직)’ 환경에 맞는다고 본다. 가정, 교육, 통신, 의학, 비지니스, 시민단체활동 등 모든 분야에서 이같은 여성적 마인드는 매우 유용하며, 여성은 다시 제1의 성을 회복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이 책은 생물학,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을 넘나드는 다양한 과학적 자료들을 인용하면서도 딱딱하지 않고 부담없이 읽힌다. 또 여성의 타자성을 극복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가능성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 여성주의와 만난다. 여성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생태여성주의 시각도 엿보인다. 생물학적 차이를 인정하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 남녀가 보완적인 양성성을 키우자는 결론은 반여성주의자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남성성과 여성성이 성호르몬의 차이만으로 결정되는 것인가는 의문이다. 저자는 여성성의 주된 뿌리를 여성의 양육경험에 두고 있다. 그러나 육아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에게만 귀속된다는 근거는 미약하다.
강고한 남성적 질서 속에 살아가는 여성의 입장에서 미래가 여성의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귀가 솔깃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쉽게 수긍할 수 없는 것은 이 책의 상당 부분이 현학적 추론과 가설에 머물고 있는 까닭이다. 저자는 ‘차이의 현상’만을 볼 뿐 여성의 차별과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차이의 구조’를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가만있어도 성평등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진화론적 믿음은 지나친 낙관이 아닐까. 정명진 옮김. 515쪽, 1만5000원.
김미희(연극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