絡―이을 락 枕―베개 침 宦―벼슬 환
漢나라 때의 일이다. 당시는 종이가 아직 발명되지 않아서 대나무쪽에다 글씨를 썼다. 이를 竹簡(죽간)이라 한다. 공문서를 보낼 때면 그 竹簡을 봉해야 했는데 물론 봉투도 없었으므로 진흙으로 싸서 봉했다. 하지만 전령이 행여 뜯어볼 수도 있었다. 의심 많은 중국사람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진흙이 굳기 전에 일정한 표시를 하게 되었는데 매번 그렇게 하자니 여간 번거롭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부호를 새겨 찍는 것이었다. ‘圖章’의 유래다. 우리가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도장은 不信의 산물인 셈이다.
不信의 더 무서운 예를 보자. 春秋戰國時代라면 諸侯(제후)들이 天子의 말은 듣지 않고 땅을 빼앗기 위해 血眼(혈안)이 되어 있을 때다. 남의 땅을 차지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中原을 삼켜 스스로 天子가 되고자 했다.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으니 ‘戰國時代’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죽어나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뿐이었다.
諸侯간의 전쟁은 상호 不信을 불러일으켰다. 신하가 제후를 삼키는 것은 茶飯事(다반사)였으며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弑害(시해)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籠絡(농락)하는 것을 두고 ‘下剋上(하극상)’이라고 했다. 高枕而臥(고침이와·베개 높이고 마음놓고 잠을 잠)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대낮에도 코 베어 가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익에 따른 제후간의 離合集散(이합집산)도 잦았다. 소위 合縱(합종)과 連橫(연횡)이다. 대체로 이 때에는 거창한 의식을 하면서 盟約(맹약)하고 문서도 교환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변치 말자는 내용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어디 그런가. 하늘을 두고 맹세한 것도 利益 앞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다. 이제는 담보물이 필요했다. 서로 상대방의 사람(주로 아들)을 교환하게 되었다. ‘人質’의 유래다. 그러나 人質을 희생시키면서까지도 盟約을 어긴 예는 많았다.
不信의 예는 이 밖에도 많다. 궁중에서는 남자의 역할이 필요한 부분도 많다. 그래서 宮人이 많았다. 宮女와 宮人이 함께 있으니 ‘일’도 많이 생겼다. 그것은 禁令으로도 해결할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정말로 ‘뿌리’를 뽑았으니 ‘宦官’의 등장이 그것이다. 모두가 不信의 所産들이다.
鄭 錫 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478sw@mail.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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