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가 폭등으로 지금 한국경제와 세계경제가 휘청이고 있다. 석유는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을 지배할 뿐 아니라 국제 정치를 지배한다. 원유가의 꿈틀거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람들은 석유의 힘을 잘 알고 있다. 이 힘을 지배하는 자는 누구인가. 에너지문제 전문가로 ‘업저버’지의 워싱턴 특파원을 지냈던 저자는 국제 정치의 역학관계 속에서 석유의 문제를 속속들이 펼쳐 보인다.
▽석유는 힘이다〓“우리는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석유를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오직 패배가 있을 뿐이다.”
1차대전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프랑스의 포쉬 원수에게 석유는 곧 힘이었다. 1차대전을 통해 사람들은 석유의 중요성을 절감했고 국제사회에는 ‘석유외교’가 등장했다.
2차대전에서 히틀러가 모스크바로 진군하며 무리하게 코카서스와 바쿠 유전 쪽의 길을 고집했던 것도 석유 확보에 전쟁의 승패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은 당연히 미국의 안정적인 석유공급을 받았던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석유가 없었다면 지금 걸프 지역에도 전운이 감돌 이유가 없다. 21세기 디지털 경제전쟁에서도 석유는 여전히 주요한 힘이다.
▽일곱 자매〓1859년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에드윈 드레이크 대령이 석유를 처음 발견한 후 석유는 수많은 벼락부자들을 만들어 냈고 세계 곳곳을 경제와 정치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 전쟁터를 먼저 점령한 것은 ‘일곱 자매(The Seven Sisters)’라 불리는 엑손, 걸프, 텍사코, 모빌, 소칼, 쉘, BP(British Petroleum)였다.
제우스에 의해 일곱 개의 별이 된 희랍신화의 일곱 자매처럼 거대 석유회사들은 불사신의 생명을 획득한 듯 전세계의 석유망을 장악했다. 이들은 또한 여느 자매들처럼 서로 다투고 경쟁을 했다. 그러나 한 가족으로서의 유사성을 여전히 간직한 이들은 외부로부터의 도전을 받게 되면 동족간의 싸움을 일단 멈췄다.
국가의 에너지원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이 일곱 자매는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석유외교의 주역이 됐고, 자국과 산유국의 정치를 좌우하며 곳곳에서 오일달러를 쓸어 담았다.
▽산유국의 반격〓그 엄청난 검은 황금을 깔고 앉아 있는 산유국이 언제까지 그것을 고스란히 내주고 있을 리 없었다. 산유국의 반격이 시작됐다. 1960년 산유국 대표들이 모여 OPEC(석유수출국기구)를 결성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산유국의 힘을 보여준 것은 리비아였다. 1970년 리비아의 카다피 대령은 석유 생산 삭감을 무기로 사용하며 일방적인 원유 인상안을 내놨다. 석유 기업들은 맞섰지만 이미 서구사회의 석유 수요가 계속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리비아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산유국들은 자신들의 놀라운 힘을 확인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1973년의 석유 위기. OPEC는 견고한 단결력을 과시하며 1개월 동안에 국제 원유 가격을 4배나 인상시켰고 산유국은 직접 석유산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아쉽게도 70년대 이후의 변화를 담지 못했다. 하지만 디지털 경제의 이면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석유의 문제를 점검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석유를 지배하는 자는 누구인가'/ 앤서니 샘슨 지음/ 김희정 옮김/ 책갈피/ 408쪽, 1만원▼
◇컴퓨터-정보통신기업에 밀려 위상도 변화
1970년대 이후에도 석유를 둘러싼 산유국과 거대 석유기업간의 싸움은 여전하다. 1973년 오일쇼크를 계기로 산유국들이 단결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예전과 달리 장기적 수급보다 단기적 수급이 많아지면서 산유국보다는 석유기업이 유리해졌다. 특히 선물거래가 도입되면서 석유상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그러나 산유국들은 국영기업과 같은 방식을 통해 이미 엄청난 양의 석유 매장량을 확보하고 다국적 석유기업과 맞서고 있다. 일곱 자매에게도 변화가 왔다. 1999년 엑손과 모빌이 엑손모빌로 합병했고 석유기업간의 크고 작은 합병은 계속되고 있다. 1972년에는 1위 엑손, 2위 쉘을 비롯해 일곱 자매가 모두 세계 12대 기업에 들어 있었지만, 2000년 초의 순위를 보면 컴퓨터와 정보통신 계통의 기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합병한 엑손모빌은 5위에 불과하다. 일곱 자매 중 나머지는 모두 순위에서 밀려났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