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위대한 작가는 그 시대의 신화를 창조한다. 작가는 당대의 하잘 것 없는 인물과 사건을 언어의 도가니 속에 넣고 제련해서 인간과 세계의 운명에 대한 놀라운 직관과 통찰을 빚어내는 연금술적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고 있는 세계 여러 작가 가운데 이스마일 카다레는 흡사 이러한 명제를 증명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을 통해 유럽의 변방 중에서도 변방인 알바니아 북부의 험준한 산악지대는 범인(凡人)들의 희비극과 영웅의 분투, 그리고 신의 섭리가 공존하는 신화적 공간으로 탈바꿈하기에 이른다. 평범하고 진부하기조차 한 산문적 현실이 이 작가의 펜 끝에선 돌연 시적 후광을 쓰고 인류라는 종(種)의 시초와 종말을 알려주는 은밀한 상징으로 변형된다.
이미 우리는 ‘죽은 군대의 장군’과 ‘부서진 사월’같은 작품을 통해 비가 추적추적 내리거나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알바니아 산악지대의 음울한 풍경 속을 거닐어본 적이 있다. 아울러 낯설기 이를데 없는 그곳 풍습과 이질적인 문화, 그리고 피에 피를 물고 계속되는 복수와 몰락의 드라마를 감상한 바 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와 너무나 다르면서도, 이상하게도 친숙하게 느껴지는 우리의 일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고 삶과 죽음의 맨얼굴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새롭게 소개되는 작품 ‘H서류’에서 카다레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소설은 녹음기라는 기계가 대중화되기 전, 알바니아 왕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양 문학의 근원인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의 작가 호메로스를 연구하는 두 명의 미국인 학자가 이 서사시의 발생과 전승에 대한 비밀을 풀기 위해 아직도 음유시인의 전통이 남아 있는 알바니아의 오지(奧地)를 방문한다. 미국 대사관에서 알바니아 왕국의 내무부 장관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산악지방의 군수에게 전달된 두 사람의 방문 소식은 고인 물처럼 닫혀 있는 그곳 지방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거기다 두 사람이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당국의 감시와 그곳 주민의 무지 때문에 다양한 소극이 연이어 벌어지게 된다. 아마도 이점, 시종 어둡고 비극적인 ‘죽은 군대의 장군’이나 ‘부서진 사월’에서 볼 수 없었던 ‘지독한 유머’ 덕분에 이 작품은 의외로 경쾌하다.
작가는 전편에 걸쳐 냉혹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인간 속에 숨어 있는 속물 근성과 허위의식을 들추어낸다. 처음엔 단순한 착각에서 시작된 군수의 과잉조치가 편견의 고착화를 거쳐 거의 신경증적 강박에 도달하는 과정은 권력의 자기 희화화를 여실히 보여주며, 답답한 생활에 싫증을 느낀 군수 부인이 꿈꾸는 미국인과의 로맨스는 우스꽝스러운 불륜으로 귀착돼 현실과 환상의 격차에 대한 쓰디쓴 인식을 불러온다. 두 사람을 감시하는 첩보원의 격식을 차린 보고서는 거기 담긴 내용이 엄숙하고 성실하면 할수록 더더욱 웃음을 자아낸다. 그 결과 이 작품은 전체주의 사회의 인간군상에 대한 뛰어난 소묘가 되어주고 있으며 이 작품이 씌어질 당시의 알바니아 공산정권에 대한 알레고리적 비판의 의미를 띠게 된다.
이와 병행해서 작가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얽힌 비밀을 풀고자 하는 두 학자의 노력이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의 민족감정의 대립에 의해 덧없이 수포로 돌아가는 삽화를 통해 지난 몇년간 발칸반도를 뒤덮은 민족분규의 비극을 예견하는 투시력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읽는 사람에게 둔중한 감동을 선사하는 것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대한 탐구와 그것의 불가능성이 새삼 환기하는 인간 조건의 비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시간과 망각에 대항하여 삶을 기획하지만 그 어느 것도 운명의 장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서사시의 비밀은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듯 하다가 영원히 미궁 저편으로 사라진다. 지상에 남는 것은 침묵, 그리고 점차적인 실명(失明) 상태가 암시하는 죽음일 뿐이다. 이처럼 사라지고 지워지는 망각의 물결을 거슬러 작가는 우리 앞에 잊을 수 없는 현대의 신화를 한편 완성해 놓고 있다.
□H서류 /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문학동네
남진우(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