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라비헴폴리스'-사랑과 인간을 말하는 SF물

  • 입력 2000년 9월 30일 10시 48분


흐르는 세월에도 그 빛이 바래지 않고, 시대의 유행에 상관없이 사랑받는 작품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순정SF 걸작 <라비헴 폴리스>가 깔끔하게 재출간됐다.

순정만화 골수팬이라면 누구나 아련한 그리움으로 추억하는 만화 <라비헴 폴리스>는 섬세하고 폭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심리묘사가 특징인 작가 강경옥의 1989년 작품이다.

만화는 서기 2025~2026년, 지구의 중립도시 라비헴을 배경으로 경찰관인 라인 킬트와 하이아 리안의 사랑 이야기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라비헴 시티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잔잔한 이야기들이 별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냉소적인 삶을 살아가던 라인은 어느날 새로운 파트너 하이아를 맞아 들인다. 히말라야의 고립된 연구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하이아는 감정 변화에 둔감한 단순 명쾌한 성격의 아가씨(단순히 바보일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있지만).

극과 극을 달리는 두 사람의 만남은 서서히 서로를 변화시킨다. 아무리 직접적으로 표현해도 이성으로서의 애정을 자각하지 못하는 하이아를 대하면서 조급함과 절박함을 느끼게 되는 라인은 자신도 모르는 새 인간다워지고 하이아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마음의 갈등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라비헴 폴리스>는 뻔한 설정으로 가득하다고 할 수도 있다. 남녀 경찰 파트너의 사랑 이야기와 적절한 액션, 일방적인 짝사랑, 감정의 줄다리기, 치고 받는 두 사람을 격려하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하는 주변 사람들, 그 와중에 싹트는 진정한 로맨스와 해피엔딩.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비헴 폴리스>가 특별한 이유는 그런 한사람 한사람의 복잡하고 미묘한 마음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데 있을 것이다. 만화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사건에 주연도 조연도 존재하지 않는 모두의 삶이 존재하는 것이다.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 방식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미래에도 살아간다. 만나고 서로 사랑하고 그리고 또 갈등하면서 언제까지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비헴 폴리스>는 핵전쟁, 인공지능 사이보그,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과 같은 파괴적 SF 요소들과는 무관한 주제의식으로 미래관을 보여주는 전혀 다른 의미의 SF물이다.

"때로 살아가는 가운데 '아아... 이 사람과 만나서 잘됐다'라는 경우가 있어. 나에게 있어서는 네가 그 경우야... 그러니까 같이 있고 싶은 거다. - 하이아를 향한 라인의 (낯 뜨거운) 고백 中에서.

김지혜<동아닷컴 객원기자>lemonjam@now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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