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슬링 블레이드>누가 날 미치게 하나?

  • 입력 2000년 9월 30일 13시 40분


할리우드엔 카메라 뒤에 서는 걸 즐기는 배우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배우로 시작했으나 감독으로도 흠잡을 데 없는 능력을 과시하는 배우들. 오손 웰즈, 크린트 이스트우드, 워렌 비티, 팀 로빈스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런데 이 위대한 감독 겸업 배우들의 목록 안에 한 사람의 이름이 보태졌다.

<유턴>에서 부풀렸던 몸매를 <에어 콘트롤>에 출연하며 군살 하나 남김 없이 뺐고, <콘에어>의 말쑥한 신사부터 <심플플랜>의 '돈 독 오른' 시골 주민까지 매 출연작마다 완벽한 연기 변신을 선보였던 배우, 바로 빌리 밥 손튼이다.

그러나 연출 데뷔작인 <슬링 블레이드>에서 그는 실험 대신 정통을 고집했다. <슬링 블레이드>는 새로울 것 하나 없는 내용으로 "누가, 어떤 상황이 살인자를 만들어내는지"를 물어본다. 25년간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었던 칼(빌리 밥 손튼)은 누가 봐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물. 어머니와 그녀의 정부를 살해한 후 정신이상 판정을 받은 그는 25년간 정신병원에 수감됐다가 풀려나기 직전이다.

어떤 사람과도 눈을 똑 바로 맞추지 못하는 그는 병원을 나오기 전 한 대학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갖는다. "또 다시 살인을 할건가요?" 이 위험하고 도발적인 질문에 칼은 의외로 덤덤한 대답을 내놓는다. "전 이제 더 이상 살인할 이유가 없어요."

25년만에 자유를 찾은 그는 정말 고향에서 개미 새끼 한 마리 건드리지 못할 만큼 순박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가끔 사회적 편견이 칼의 재활을 어렵게 만들기도 하지만, 믿어주는 몇몇 친구들로 인해 칼은 행복하다. 수리의 귀재인 그는 직장에서 믿음직한 일꾼이며, 순진한 소년 프랭크(루카스 블랙)에겐 모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친구다.

그러나 살인할 이유가 없을 거라고 믿었던 칼은 또 다시 살인자가 된다. 프랭크 엄마의 연인인 도일(드와이트 요아캠) 때문이다. 칼은 오래 전 어쩔 수 없이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비극을 프랭크의 삶 속에서도 본다. 자신은 이미 '망친 삶'이지만 더 이상 비극을 낳고 싶지 않았던 그는 버려 두었던 제초용 칼을 집어들고 프랭크의 삶을 구원한다.

정상과 비정상으로 크게 나눠 구분하자면 <슬링 블레이드>의 캐릭터 분류법은 일반적인 그것과 다르다. 게이나 정신박약아 등 이른바 비정상인들이 정상인처럼 보이며, 멀쩡하게 생긴 일반 사람들은 비정상적인 사건의 진짜 가해자로 그려진다. 그래서 칼은 25년 전에 들었던 '제초용 칼(슬링 블레이드)'을 다시 들 수밖에 없는 인물. 고통받는 친구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그는 '인간 청소부'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빌리 밥 손튼은 도발적이지 않은 영상으로 살인자를 만들어내는 이 사회의 이면을 조용히 파헤친다. 원시적 야만인처럼 보였던 인물이 사실은 정상인보다 훨씬 인간다운 캐릭터였음을 알려주는 영화의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첫 장면에서부터 칼이 다시 살인을 저지를 것임을 뻔히 노출한 탓에 영화의 긴장감은 훨씬 느슨해졌다. '드라마 게임' 식의 구조로는 관객들의 내면을 들쑤실 힘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다만 각본, 감독, 배우 1인3역에 도전한 빌리 밥 손튼의 치밀한 내면 연기만이 영화의 긴장감을 힘겹게 잡아주고 있을 뿐.

<슬링 블레이드>는 97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빌리 밥 손튼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가 <샤인>의 제프리 러시에게 아깝게 트로피를 내줬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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