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日가요 상륙의 선봉 '길보드 특공대'

  • 입력 2000년 10월 3일 19시 05분


서울 청담동 밤거리. 휘영청한 네온사인 사이로 일본 여가수의 애절한 목소리가 스며든다. 진원지는 ‘길보드’로 불리는 리어커 좌판의 낡은 앰프.

말쑥한 양복 차림의 20대 후반 직장인이 기웃거린다. “이거 쿠라키 마이 노래죠? 어디 있어요?” 좌판에 깔린 100장 남짓한 음반 중에 하나를 건네주며 주인장이 한마디 거든다.

“‘델리셔스 웨이’라고, 일본에서 12주째 1등이예요. 발라드풍인데 노래 다 좋아요.”

젊은 고객은 살까말까 쟈킷을 살피며 뜸을 들인다. 때를 놓치지 않고 주인은 노회한 어투로 결정타(?)를 날린다. “들어보고 맘에 안드시면 도로 갖고 오세요. 딴 걸로 바꿔드릴게”. “진짜요?” “그럼요. 이건 단골장사인데.”

청년은 1만원을 꺼내 주인에게 건내고 음반을 집는다. “그건 빈 껍데기고 진짜는 딴데 있어요.” 주인은 능숙히 사주를 경계하더니 모처에 숨겨둔 박스에서 CD를 꺼내 온다. “일본 음반 개방된다는데도 수시로 단속이 떠요. 일주일에 두 번 나올 때도 있다니까. 한 장이라도 덜 뺏기려면 이렇게라도 해야지….” 드믄 최신 음반과 ‘오리지널’이라는 4만∼5만원짜리 대만제 일본노래음반을 보호(?)하려는 고육지책이다.

단속 와중에 ‘J―Pop 길보드’는 10여년을 살아남았다. 지금도 청담동이나 압구정동, 동대문, 대학로, 홍익대와 이화여대 인근에서 밤도깨비처럼 출몰한다. 카운터 밑에 해적판 박스를 갖추고 단골만 상대하는 몇몇 레코드점 같은 ‘숍보드’도 건재하다.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이곳은 유통 불허 상태인 일본 팝음악(J―Pop)이 이 땅에 처음 뿌리를 내리는 지점이다. 한 평 남짓한 좌판이 우리 문화에 끼친 의미가 결코 작지 않음은 이 때문이다. 일본음악 평론가인 신용현 PD는 이곳을 “척박한 우리나라에 J―Pop 시장을 일군 전위이자, 향후 일본 음반진출의 향배를 좌우할 ‘보이지 않는 손’이다”고 평가했다.

여기서 최초의 소비자에게 건네진 J―Pop 음반은 입소문과 복제를 통해 무한 증식한다. 공테이프 뿐 아니라 MD나 CD 복제기 같은 디지털의 이기를 통해 애호가가 확대 재생산된다. 일본 대중음악 전문잡지 ‘J―Pop’의 이청훈 편집장(40)은 “현재 일본 팝음악 팬층은 약 10만명 정도, 이중 ‘골수팬’은 1만명 정도”라고 추정했다.

이들이 소비하는 ‘J―Pop 길보드’ 앨범의 규모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음반 전문레이블인 ‘자이브’의 이영일 대표는 “우리나라에서 비공식적으로 유통되는 일본 음반은 연간 100만장에 이를 것”이라고 짐작했다.

모든 ‘길보드’의 출신성분처럼, 여기에 깔린 음반도 100% ‘짜가’(해적판)다. 신PD는 “국내 일본음반의 80%는 카피다. 이중 60%는 우리나라에서, 40%는 대만에서 불법 제조된 것이다. 정품도 일본 보다 단가가 훨씬 싼 대만에서 보따리 장수를 통해 흘러온 것이 대부분이다”고 전했다.

좌판에 얼굴을 내민 음반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자생적인 팬클럽이 있을 정도로 이름있는 가수가 대부분이다. ‘X 저팬’ ‘스피드’와 아무로 나미에의 앨범은 라이브, 리메이크 음반을 합쳐 각각 10종이 넘는다. ‘차게 앤 아스카’ ‘글레이’ ‘라크 엔 시엘’ ‘드림스 컴 트루’도 여러 장 눈에 띈다.

“여긴 골수는 아니라도 일본 음악을 꾸준히 듣거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주로 찾아요. 대학생이나 20대 젊은 손님들이 제일 많지. 종종 ‘안전지대’ 같은 옛날 판을 찾는 30대도 들르죠.” 요즘은 특히 J―Pop에 관심이 동한 20대 여성 손님이 많이 늘었다고 귀뜸했다. 이들 때문에 여러 가수의 히트곡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짜깁기 음반)이 가장 많이 팔린다고 한다.

앨범 몇 장을 들쳐보고 발길을 돌린 김민훈씨(서울대 대학원·28)는 “이런 길보드는 20대 초심자용”이라고 귀뜸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가수 앨범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몇몇 J―Pop 사이트를 이용하면 금새 배달해줘요. 진짜 마니아들은 비싸도 일제 진품을 구하지 ‘짜가’는 상대하지 않죠.”

오랜 풍상을 겪은 ‘길보드 마켓’도 세파에 닳고 있음이 역력했다. 하루에 20∼30장은 팔리는 눈치지만 몇 해전과 비교해 ‘사세’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지난해만도 이 동네에 일본음반 좌판이 2,3군데 더 있었는데 죄다 없어졌어요. 압구정이나 청담동 레코드가게에서도 이젠 잘 취급하지 않아요”

단속도 문제지만 인터넷이나 MP3 파일 때문에 일본음악의 주고객인 고등학생이 길보드와 멀어진 것도 한 몫했다. 일본 팝밴드 ‘자드’의 팬이라는 이현재군(서울고1)은 “인터넷을 뒤지면 좋아하는 일본 팝음악의 대부분을 다운받아 들을 수 있고, 최신곡 음반을 갖고 싶으면 e메일로 곡명만 보내주면 CD를 구워서 보내주는 사이트도 많다”고 전했다.

또 하나 중요한 변화는 일본 가요팬층이 점차 분화되는 점이다. 일본 팝의 영역이 넓은데 ‘X 저팬’이나 아무로 나미에만 찾던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이 편집장은 그 실례로 “요즘엔 강남이나 동대문, 홍익대 인근 사무실에서 일본 음반 라이브러리를 갖추고 다양한 음악을 녹음해 파는 ‘오피스텔 길보드’가 호황이다”는 점을 들었다.

정작 작은 리어커로 몰아칠 태풍주의보는 2002년 월드컵 이전에 이뤄질 것으로 보이는 ‘일본 음악시장 전면 개방’이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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