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츠와 바지 곳곳에 페인트가 묻는 줄도 모른 채 쉴새없이 붓을 놀리는 이들의 표정은 시종일관 진지하기만 하다. 이들은 작업을 마무리한 뒤 “사흘 밤낮으로 구슬땀을 흘린 ‘역작’인만큼 시민들의 반응이 기대된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들은 올해로 8회째인 거리미술전 행사의 하나로 학교 주변 거리 벽면에 벽화를 제작 중인 ‘거리의 미술가들’. 매년 이맘때면 80여명의 미대생들이 회색빛 거리의 벽면에서 창작의 나래를 펼친다.
10여년 전 몇몇 미대생들이 시작한 거리벽화는 인근 주택가와 상가를 ‘거대한 미술관’으로 바꿔놓고 있다. 칙칙한 시멘트와 벽돌담은 때론 태양이 작열하는 백사장이나 시공(時空)을 초월한 유토피아로 바뀐다. 아마추어 작가들의 끼와 상상이 가득한 작품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 이들은 “종이 여백을 벗어나 현실의 거리를 큰 화폭삼아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며 대중과 교감할 수 있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예술의 길은 멀고도 험한 법. 과감히 캔버스에서 ‘탈출’했지만 당장 그림을 그릴 담벼락을 물색하는 일부터 녹녹하지 않다. 공공시설물의 경우 행정기관의 사전허가를 받아야 했고 주택이나 가게 등 개인소유의 담은 주인을 찾아가 완성작품의 샘플을 보여준 뒤 인내심을 갖고 최대한 설득해야 했다.
작업과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뙤약볕 아래 비지땀을 흘리거나 추운 겨울에 꽁꽁 언 손을 부벼가며 그려야 했다. 정육점 담벼락에 풍경화를 그릴 때 반드시 소를 그려달라는 업주의 ‘주문’은 차라리 애교스러웠다. 시장골목 10여m의 담벼락에서 작업할 때 아랫도리를 벗은 꼬마들의 모습이 ‘망측스럽다’는 일부 주민의 반발로 중요부위를 ‘꽃’으로 가리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겪었다.
거리를 켄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다보니 황당한 경우도 많았다. 야간에 작품이 그려진 담에 ‘실례’를 하는 취객이나 작업 중인 담벼락 앞에 하루 종일 차를 세워놓는 ‘얌체족’ 때문에 낭패를 보는 일도 비일비재한 것. 그러나 회색빛 거리가 나날이 형형색색의 생기를 되찾으면서 “남의 담벼락에 웬 낙서”라며 호통치던 주민들 상당수가 이젠 “고생한다”며 페인트 구입비용을 보태주거나 빵이나 음료수 등을 건네주는 등 성원해줘 큰 보람을 느낀다.
김진혜씨(21·홍익대 판화과2)는 “거리의 그림들을 눈여겨본 카페나 음식점에서 작품을 그려달라는 요청이 잇따른다”며 “거리벽화가 생활 속의 예술로 뿌리내려 답답한 도심 속의 ‘청량제’로 자리잡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상호기자>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