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서점을 통해 발표된 ‘러셔(RUSHER)’는 다른 e북 소설에 비해 인터넷의 주된 독자집단인 ‘리티즌’(litizen)의 독서 취향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작품이다. 새로운 문학 환경이 작가의 세계관과 창작 방법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사이버문학’의 구체적인 텍스트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소설은 ‘컴퓨터로 통제되는 견고한 지배 메카니즘과 거기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를 소재로 삼고 있다. 사이버펑크 영화의 상상력을 부분 카피했지만 가상공간에 익숙한 네티즌들에게는 SF가 본격문학 작가에 의해 문학 텍스트로 형상화된 것은 신선한 자극이다.
그동안 백민석이라는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준 작품 세계는 환상적 리얼리티(‘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극단적인 사도―메저키즘(‘목화밭 엽기전’)처럼 그 스팩트럼이 다양했다. 이런 점에서 e북을 통한 SF 장르라는 문학적 시도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 배경인 미래의 한국(‘싸우스 코리아 시(市)’)은 심각하게 환경이 오염된 현실세계와 현실세계의 오염물들을 배출해내는 ‘샘 샌드 듄’이라는 가상세계로 나누어져 있다. 현실 세계의 오염물들은 ‘호흡중추’의 통제로 ‘호흡구체’라는 거대한 팬을 통해 ‘샘 샌드 듄’으로 배출된다. 스토리는 주인공인 용병 ‘모비’와 여성전사 ‘메꽃’이 지배권력인 초월자 계급에 의해 가동되는 호흡중추를 파괴하기 위해 도시 심장부로 러쉬를 감행하지만 결국 실패한다는 내용이다.
특별해 보이지 않는 외형적인 스토리 라인의 이면에 기왕의 SF와는 다른 백민석 류의 SF 문법이 숨어있다. 우선 선악의 대립구조가 분명하지 않고 모비나 메꽃이 왜 호흡중추를 파괴하려는가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다. 저항의 당위성은 생략된 채 무모한 돌진만이 텍스트에 가득하다.
그러나 드러난 권력(조지 오웰이 ‘1984’를 통해 그려냈던 ‘빅 브라더’ 같은) 보다 ‘러셔’에서 ‘초월의 나무’로 형상화된 실체 없는 권력과 그 권력에 스스로 편입하는 두 주인공의 여정은 미래의 절대적인 권력 메카니즘에 대한 불안을 더욱 극적으로 상징한다. 또한 ‘러셔’에는 익숙한 영상 이미지들이 텍스트 전체에 스며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 모비가 추방되는 ‘샘 샌드 듄’은 영화 ‘저지 드래드’에 나오는 황량한 유배지를, 공격용 우주선과 전투 장면은 ‘스타워즈’나 ‘공각기동대’의 전투씬을, 모비와 메꽃은 ‘메트릭스’의 남녀 주인공과 겹쳐진다.
독자들의 기시감을 리얼리티 장치로 이용하는 ‘메타 리얼리티’ 전략은 작가가 이 작품의 타킷을 영상 이미지에 익숙한 신세대로 잡았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모비’와 ‘메꽃’이라는 두 주인공의 행위 동선을 서로 교차하며 보여준다거나, 심리상태는 간결한 문장인 반면 전투장면은 세밀한 묘사로 형상화한 점 등은 ‘읽기’보다는 ‘보기’가 강조되는 e북의 존재양식이 서사 전략에 미친 영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물론 e북이 ‘문장’보다는 ‘단어’에 독자의 시선이 집중된다는 점에서 과도하게 사용된 외래어와 신조어가 독서 흐름을 방해하는 등 미학적 약점을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러셔’는 새로운 매질에 맞는 주제와 소재, 서사 방식을 전략적으로 선택해 일정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
백민석의 작가적 품성이라면 독자들의 기대지평 너머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킬 줄 아는 본능적인 감각이다. 문학계의 ‘러셔(rusher)’임을 자임한 그는 이번에 e북과 SF의 결합이라는 또 한번의 문학적 러시(rush)를 감행한 셈이다.
이용욱(문학평론가)
◇국내 SF소설 어디까지…
미국과 달리 과학소설(SF) 지형은 척박하다. 외국 유명 작품이 간간히 소개되지만 판매량은 미미하다. SF 소설과 공상과학 만화를 동일시하는 완고한 고정관념 때문이다.
해외작가중 SF의 태두이자 대표자는 아이작 아시모프다. 20권이 넘는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우주 대서사시(Space Opera)’로 불리는 고전중의 백미. 폴 앤더슨의 ‘타임 패트롤’ 시리즈(시공사)도 시간 모험물의 대표작이다. ‘사이버 스페이스’란 말을 창조한 윌리엄 깁슨의 ‘뉴로멘서’(열음사)도 사이버 펑크 소설의 효시로 꼽힌다.
우리나라에서 SF소설집은 1988년에 천리안에 올려진 이성수의 ‘스핑크스의 저주’(고려원)가 처음. 순수문학 작가로는 복거일이 2030년 세계 각국의 월면기지가 세워진 달을 배경으로 남남북녀의 사랑을 다룬 ‘파란 달 아래’(문학과지성)를 펴내기도 했다. 최근작으로는 얼굴 없는 작가 듀나(필명 이영수)의 SF소설집 ‘면세구역’(고려원)이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러셔(Rusher)'/ 백민석 지음/ yes24(www.yes24.com)/ 266kb 3000원▼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