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프랑스식 '감각의 제국'<로망스>

  • 입력 2000년 10월 25일 16시 37분


<로망스>는 섹스라는 은밀한 단어에 당의정을 입히지 않는다. 소시지처럼 부풀어오른 남성의 성기와 블랙홀처럼 이를 빨아들이는 여성의 성기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철퍼덕거리는 성기와 성기의 마찰음까지 적나라하게 잡아낸다.

환상은 없고 지독한 피사체의 진실만 남은 이 영화에서 우리가 볼 수 없는 섹스의 형태란 단언컨대 거의 없다. 마조히즘과 사디즘, 오럴 섹스에 이르기까지, 온갖 섹스의 유희를 백화점 식으로 나열한 <로망스>는 93분의 러닝타임을 질펀한 땀과 신음소리로 채운 '소돔 120일'이다.

영화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마리(카롤린 듀세)의 성에 대한 갈증과 욕망의 해소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녀에겐 현재 동거중인 남자(사가모르 스테브넹)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지적인 남자는 성에 집착해선 안 된다"는 이상한 강박관념에 빠져 있다. "섹스하기 싫으면 애무라도 해달라"는 그녀의 청에 "지금 널 애무하는 건 경멸일 뿐"이라며 단호히 거절하는 남자. 마리는 폴의 성기를 자기만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늘 갈등한다.

안에서 채울 수 없는 욕망은 밖으로 쉽게 빠져나가는 법. 덜 자란 듯 앙상한 몸을 지닌 마리가 처음 눈을 돌린 남자는 카페에선 만난 파올로(로코 시프레디)다. 그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성기로 그녀의 몸을 쑤셔대지만 사랑이 동반되지 않는 섹스는 마리의 욕망을 온전히 채워주지 못한다. 그날 밤 다시 폴에게 돌아온 마리의 눈빛엔 사랑과 쾌감이 모두 충족되지 못한 짙은 허기가 담겨져 있다.

육체적인 쾌락과 정신적인 사랑의 대상이 다른 그녀는, 이제 또 다른 성적 판타지에 눈뜬다. 새로운 성적 판타지의 안내자는 추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숱한 여자들의 몸에 정액을 뿌린 화려한 여성편력의 소유자, 현대판 돈환으로 불리는 교장 선생님이다. 그는 마리의 몸을 꽁꽁 묶은 뒤 팬티의 정 가운데를 가위로 덥석 잘라버린다. 마리는 아픔에 몸을 떨지만 이런 변태적인 섹스를 통해 죽음 직전의 쾌감을 맛본다.

<로망스>는 이 질펀한 성적 유희 안에 또 하나, '생산과 번식'이라는 생물학적이고도 도덕적인 화두를 던져놓는다. 마리와 동거중인 폴은 섹스를 경멸하면서도 번식은 숭배하는 이상한 강박관념의 소유자. 아이를 낳기 위해 나누는 섹스는 성스럽고, 쾌감을 위해 나누는 섹스는 미천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남자다. 마리는 이런 폴의 바람대로 섹스의 쾌감을 그저 소비하는 게 아닌, 종족의 번식자로 거듭난다. 그러나 섹스와 번식, 사랑과 쾌락에 관한 마리의 고민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로망스>가 포르노와 비슷한 어법으로 섹스에 접근하면서도, 포르노로 빠지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로망스>의 섹스 신은 관음증적 쾌락을 만족시키기보다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 연출된 성애장면이다.

포르노 영화라면 흔히 성기와 성기의 물리적 접촉에만 몰두하는데, 이 영화의 카메라는 육신을 떠나 자주 다른 곳을 비춘다. 마리의 사색적인 얼굴과 정사 후의 허탈한 몸짓에 이르기까지. 게다가 적나라한 섹스 신에서조차 마리의 철학적인 독백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키스는 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해버리고 말았다", "난 자위할 때조차 강간의 포즈를 취한다" 등의 내레이션은 성적 쾌락에 함몰되려는 관객의 정신을 힘껏 붙잡는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대담한 포르노 타입의 정사 신을 연출한 인물이 여성이라는 것. <로망스>를 연출한 카트린느 브레이야 감독은 17세 때 이미 <쉬운 남자>라는 대담한 성애 소설로 프랑스 문단을 들쑤셨던 인물. <서른 여섯 살의 작은 소녀><완전한 사랑> 등의 전작에서도 그녀는 위험한 정사 신을 과감히 연출해낸 바 있다.

감독 스스로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에 바치는 오마주"라고 밝힌 <로망스>는, 전작의 도발성을 훌쩍 뛰어넘는 위험한 도박으로 가득하다. 남녀의 성기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카메라, 여성의 출산을 양수 찌꺼기가 흐르는 마지막 장면까지 한 커트도 놓치지 않고 보여주는 대담한 연출 등, 충격적인 영상은 93분 내내 쉴 틈 없이 이어진다.

<로망스>가 던져주는 충격은 사실 내용만의 문제가 아니다. 극중 파올로 역을 맡은 로코 시프레디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포르노 배우. 유럽 하드코어 영화에만 모습을 비췄던 그에게 주요 배역을 맡긴 것은, 감독이나 배우 자신에게 모두 위험한 도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망스>의 도박은 성공적이었다. 파올로 역을 맡은 로코 시프레디는 본능에 충실한 남성의 표상을 멋지게 연기했으며, 마리 역을 맡은 카롤린 듀세는 자칫 도발에 그칠 뻔한 이 영화에 고상함을 더했다.

몸은 변태적인 섹스를 쫓아가면서도 정신은 사랑과 쾌감에 관한 사색으로 꽉 채운 여자 마리를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카롤린 듀세 밖에 없어 보인다. 그녀는 청순함 안에 도발적인 광기를 숨긴 외모로 <로망스>의 위험한 사랑을 독창적으로 표현해냈다.

<로망스>는 <감각의 제국>의 2000년대 버전으로 손색이 없는, 무뎌진 감각에 꽂혀진 독침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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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로망스'감독 카트린 브레이아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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