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중독증에 빠진 주인공 아리(미코 노우자이넨)는 사랑이 아니라 오감의 느낌만을 믿어버린 남자. 그는 "삶의 모든 걸 알고 싶다면 끝까지 한 번 가봐야 한다"는 지론으로 정말 끝까지 간다. 사랑이 정신과 육체의 절묘한 조화로 이루어진 것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허리 아래' 쪽 사랑에만 지나친 열정을 쏟아 붓는 그는, 한마디로 위험한 사상가이자 '몸 철학'의 실천가다.
그러나 해변에서 만나 연애를 시작한 여자 티나(로라 말미바라)는 상처만 남겨줄 뿐인 그를 지독히도 사랑한다. 사랑을 믿지 않는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관계를 이어가려는 그녀에게 아리는 결코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는 티나의 친구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그녀의 친구들과 비밀스러운 정사를 나누고, 가끔 길에서 만난 나이든 여자나 친구 부인에게까지 정액을 쏟는다.
영화는 물론 처음부터 아리가 왜 이렇게 사랑이 아닌 섹스에만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설명해준다. 영화 초반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고 있는 아리는 기차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읊조린다. "난 오랫동안 세계 평화와 가정, 학문적 성, 여자에 대해 탐구했지만 인생이 공허하다는 걸 깨달았다."
첫 장면에서 아리가 내뱉은 대사는 사실 영화에서 펼쳐지는 온갖 사건을 경험하고 난 후, 그가 내린 '삶과 사랑'에 대한 결론이다. 영화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처음과 끝을 연결시킨 후 그 안에 아리의 난잡한 성적 에피소드를 풀어놓음으로써, 아리가 내뱉은 독백의 의미를 관객들이 함께 탐구해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첫 대사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아리가 여성이나 학문적 성, 사랑을 탐구하는 방식은 갈 데까지 가보는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종교인들은 "혼전에 성을 낭비하는 게 정말 바람직한 걸까요"라며 잔뜩 비아냥거리지만, 아리와 그의 친구들은 이런 지적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 역시 성을 아낌없이 소비하고 있다. 그룹 섹스, 릴레이 섹스, 친구의 연인과 나누는 섹스 등. '벌거벗은 몸'에 대한 탐닉은 북유럽의 멋진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신선한 전율마저 자아낸다.
하지만 모든 것에 무관심한 듯 보이는 아리는 정말 삶을 모조리 알기 위해 끝까지 가보는 것일까. <레스트리스>는 '쉴틈없다'는 영화의 제목처럼, 쉴틈 없는 정사신으로 이것에 대한 해답을 비껴간다.
마지막에 아리는 "삶에 대한 궁금증은 스스로 몸을 부대끼면서 배울 수밖에 없다"는 멋진 대사를 읊조리는데, 그걸 알려주기 위해 소비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삶과 사랑에 대한 의미 있는 일침 대신 독설처럼 진한 섹스의 향연만 머릿속에 깊이 남겨줄 뿐이다.
게다가 <레스트리스>는 이런 파격적인 영상과 어울리지 않게 상투적인 이야기를 답습하고 있다. 사랑을 믿지 않는 남자와 사랑을 믿고 그 남자의 아이까지 낳아 기르는 여자의 이야기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익숙한 설정이다.
하지만 핀란드에서 이 영화가 거둬들인 성과는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레스트리스>는 99년 핀란드 개봉 당시 브라이언 드 팔머 감독의 <미션 임파서블>을 제치고 1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라는 놀라운 흥행 기록을 세웠다. 11월4일 개봉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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