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환의 디지털그늘]디지털기록은 낡지 않는다

  • 입력 2000년 10월 29일 18시 56분


잠시 먼 미래를 상상해 보자. 앞으로 천년 뒤, 그 때 우리 후손들은 역사를 어떻게 볼까? 인류는 20세기 후반부터 전혀 새로운 종류의 역사적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고 볼 것이다. 바로 디지털 정보로 된 영상물이다. 예컨대 서기 30세기의 우리 후손들은 15세기의 세종대왕이 어떤 표정과 목소리로 훈민정음을 반포했는지에 대해서는 영원히 알 길이 없겠지만, 20세기의 김대중 대통령은 어떤 목소리와 표정으로 연설했는지, 김정일 위원장을 처음 만나 악수할 때 손을 몇 번이나 흔들었는지 등에 대해 생생하게 보고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원본과 복제본 똑같은 정보◇

디지털 정보의 시대에는 세월은 흘러가도 기록은 낡지 않는다. 디지털 정보의 복제는 원본과 복제본이 똑 같은 정보량을 갖는 완벽한 복제이기 때문이다. 수 천 년 된 비석에 쓰여진 글은 제아무리 정성껏 보존해도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언젠가는 삭아 없어지고 말겠지만, 디지털 정보는 완벽한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엔트로피 법칙으로부터도 자유로우며 따라서 시간의 영향으로부터도 자유스럽다. 디지털 텍스트는 천년이 지나도 만년이 지나도 이론상 똑같은 상태를 유지할 가능성을 갖는다.

우리는 천 년 전을 대단히 먼 과거로 여긴다. 그것은 지금 남아 있는 천 년 전 자료를 다 모아 봐야 얼마 되지도 않으며, 우리 선조들이 느끼고 경험했던 그 당시 사회 문화 현상을 경험해보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천년 만년 지나도 그대로◇

국립 박물관에 가면 강희안의 ‘고사관수도’를 볼 수 있다. 그 그림은 500년 전에 비하면 빛도 바래고 많이 ‘낡은’ 것이다. 그러나 만약 강희안이 20세기에 태어나서 컴퓨터를 사용해서 ‘고사관수도’를 그려 컴퓨터 파일로 저장해 뒀다면 어땠을까? 그러한 ‘디지털 고사관수도’는 전혀 낡지도 바래지도 않을 것이다. 기호학적으로 말하자면 ‘디지털 고사관수도’를 바라보는 우리 후손들은 우리가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지각 편린을 생산하게 됨으로써 시간의 간극을 건너 뛰어 우리와 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천 년 뒤의 우리 후손들은 디지털 역사가 시작된 20세기 이후는 그다지 먼 과거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경험하는 정치인이나 대중 스타들의 시뮬라크르를 똑같이 경험할 수 있을 것이고, MP3 파일에 담긴 서태지의 음악은 천년이 지나도 만년이 지나도 그 음색이 변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이제 전혀 다른 시간의 감수성을 지니고 살아가게 되었다. 문자의 발명이 선사시대를 끝내고 역사시대의 막을 열었듯이, 디지털 기록은 역사시대를 끝내고 탈(脫)역사의 시대를 열고 있다.

◇장난메일도 주의할 일◇

오늘날 연일 신문지상과 방송 뉴스를 뒤덮는 정치인들의 비리 역시 뉴스 데이터베이스에 차곡차곡 쌓여 우리의 추악한 모습을 후손들에게 생생히 전달해 줄 것이다. 시간이 약이고, 세월이 흘러가면 희미한 추억 속에 모든 것이 아름다워만 보이던 좋은 시절은 이제 다 지났다. 한번 나쁜 짓을 해서 뉴스 데이터베이스에 오르게 되면 천년 만년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무시무시한 디지털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장난삼아 만드는 웹 페이지 한쪽, 무심코 보내는 전자메일 하나, 별다른 생각 없이 올리는 게시판 글 한 줄 역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사이버공간을 떠돌지 모르니 주의해야 할 일이다.

김주환(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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