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준의 재팬무비]타이거 마스크, 타아이가 마수쿠

  • 입력 2000년 10월 31일 10시 19분


일본과 가까운 항구 도시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일본 방송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 만화 영화나 <울트라맨> <세븐> 같은 특수촬영 영화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재미있었습니다.

사회에서 알게 된 친구는 어릴 때 열광했던 <타이거 마스크>나 <마징가 제트>가 뒤늦게 '일제'라는 사실을 알고 분개했다지만,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유케, 유케, 타이가―, 타아이가 마수쿠'(달려라 달려 타이거 마스크) 하는 <타이거 마스크> 주제가를 따라 부르며 놀았던 터라, 이 작품의 국적이 일본인지는 진작에 알고 있었습니다. 뭐, 자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가지 웃겼던 것은 일본 사람들의 영어 발음이었습니다. 주인공 신밧드가 마징가 벨트라는 허리띠를 꽉 조여 매면 힘이 세져서 악당들을 물리치는 만화 영화가 있었는데, 제목이 '신도밧도노 마징가 베르토'였습니다. '신밧드의 마징가 벨트'라는 단어를 그렇게 발음한 것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대부> 일본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ゴッドファ-ザ-'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곳도화-자-'가 됩니다. 원제인 '갓 파더(God Father)'를 일본 발음대로 쓴 제목이지요. 참고로 일본에서는 영어의 'th' 발음을 '지읒(ㅈ)'으로 표기합니다. 그러니 '파더(father)'는 '화-자-', '브라더(brother)'는 '브라자'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발음을 들을 땐 정말 많이 웃었습니다. "애걔, 무슨 놈의 발음이 저 따위야" 하면서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철없는 짓입니다.

한 나라 글자는 그 나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발음만 표기합니다. 한글에 영어의 'th' 발음이나 'z' 발음을 그대로 표기하는 글자가 없듯, 일본어 역시 다른 나라 발음을 온전히 표기할 수는 없습니다. 발음이 없으니 글자도 없는 것이고, 또 글자가 없으니 발음 하기도 힘듭니다. 받침 발음이 'n' 'm' 't' 정도밖에 없고 모음 또한 한정돼 있는 일본말에서 '벨트(belt)'를 '베르토'라고 발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걸 '벨트'라고 표기하고 발음한다고 해서, 한국어가 일본어보다 더 나은 표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낫다면 또 얼마나 더 나을까요? 이 글을 쓰는 사람은 오십보 백보라고 생각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영어 발음과 다르기는 매한가지란 것이지요. 미국 사람이 '철수'에게 '촐쑤'라고 부르는 것이나, 일본 사람이 '초루수'라고 말하는 것이나 엉터리이기는 매한가지 아닐까요?

사실은 'Sinbad'를 '신배드'라 쓰지 않고 일본식 대로 '신밧드'로 쓰거나 <파랑새>의 틸틸, 미틸을 일본식으로 치루치루, 미치루라고 표기한 우리 나라 번역가들이 정말 부끄러운 것이지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말 모두를 소릿값 그대로 표기할 수는 없습니다. 또 모든 발음을 굳이 그렇게 완벽하게 표기할 필요도 없겠지요. 무엇 때문에 구태여 우리에게 그렇게 힘든 발음을 표기해야 합니까. 완벽하게 표기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일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말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문제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외국 사람에게 한국어를 완벽하게 발음할 수 있게 만드는 로마자 표기는 세상에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지요. 이런 이유로, 외국 사람이 우리말을 제대로 발음하게 하는 문제보다, 우리말을 효과적으로 표기하는 데 중점을 둔 이번 한국어 로마자 표기법에 찬성합니다(비록 전문가는 아니지만 어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또 글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으로서 이 정도 의견 개진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최근 일본에서 크게 인기를 끈 대규모 액션 영화 <화이트 아웃>이 곧 국내 개봉합니다. '화이트 아웃'이라는 가스 때문에 온천지가 하얗게 뒤덮혀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는 기상 현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영화의 일본 오리지널 제목은 'ホワイト アウト'. 우리 식으로 읽으면 '호와이토 아우토'가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화이트 아웃(White Out)'을 그렇게 발음하고 표기한다고 해서 너무 비웃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외국어를 발음하는 건 어느 나라 사람이나 다 어려워하는 부분 중 하나니까요.

김유준(영화 칼럼리스트) 6609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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