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신비를 하나씩 벗겨내기 시작한 현대 과학의 발전과 함께 인간은 자연을 정복과 이용의 대상으로 보면서 절대적인 존재로서 지구 생태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전이라는 기치 아래 행해진 자연의 무차별한 이용과 남용은 지구 생존의 위협까지 초래했다. 이때서야 인간은 생태계 속의 한 부분으로서, 거대한 자연 순환 속의 미약한 존재로 스스로를 깨닫기 시작했다. 》
디자인의 역사는 인간욕망의 역사다. 생활용품의 인위적인 폐기와 함께 스타일이 곧 개성의 표출로 여겨지면서 디자인은 인간의 끊임없는 자기 표출의 욕망을 대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도시의 발달 또한 그 자체가 자연을 인간의 생활에서 축출해 온 역사였다. 하지만 지구의 위기와 함께 디자인의 판단 기준 또한 달라지고 있다. 환경에 관한 자세가 디자인의 기본적인 윤리성을 측정하는 도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분홍 장미가 링컨 콘티넨탈을 휘감으며 피어나는 전시 작품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식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태양 왕의 궁전인 ‘베르사이유’로 명명된 이 자동차는 현대의 물신(物神)주의, 호화로움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을 나타낸다.
하지만 연약하고 제멋대로 휘어진 장미의 줄기들이 이 자동차의 운행을 막으면서 자라나고 있다. 자동차의 기능을 차단한 것이다. 이 외에도 식물과 잡초 등이 근래의 전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것은 자연에 관한 인간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자연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환경에 관한 위기 위식이 반영된 것이다. 이것은 20여년 전부터 시작된 지구 환경을 보호하자는 계몽의 메시지가 조금 더 폭넓은 영역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계몽의 차원을 거쳐 개인적인 실천의 단계를 보여주는 디자인은 재사용(Reuse)에서 많이 드러난다. 10여년 간 환경을 주제로 작업해 온 디자이너 윤호섭의 개인전 포스터는 신문지에 일일이 먹물을 사용해 그린 것이다. 1,500 여장의 포스터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종이와 환경에 유해할 수 밖에 없는 인쇄 잉크의 사용이 줄어든 것이다. 폐지인 신문지를 활용해 만든 의자도 이런 재사용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도는 개인이 자신의 생활에서 실천한다는 의미도 가지지만 동시에 일회적인 한계를 지닌다.
개인적 에콜로지를 표방하는 완더 원더의 사과쥬스 용기 디자인은 재사용의 한 전형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기업에 받아들여져 정책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예다. 쥬스가 비어지면 리필 용기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새집으로도 쓸 수 있게 디자인되어 있다.
자원 절감(Reduce)은 영국의 전화 번호부인 옐로우 페이지에서 잘 들어난다. “10% 얇게, 10% 울창하게”라는 슬로건으로 광고되는 영국의 새 전화번호부는 인쇄상 글자 사이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 새로운 서체를 개발했으며 3단 편집을 4단으로 바꿨다. 그러면서 가독성은 높아지고 종이는 10% 절감되었다고 한다.
재활용(Recycle)의 대표적인 예이면서 동시에 환경보호에 가장 효율적인 디자인으로 평가 받는 것은 모빌 정유회사의 엔진오일 용기다. 이 용기는 엔진오일을 차에 붓는 작은 주입구와 차에서 교환해야 할 오일을 받을 수 있는 큰 주입구를 가지고 있다. 이 통에 채워진 폐유는 다시 모빌에서 수거하여 재생 장소로 안전하게 운반된다. 우리 주변의 어디론가 마구 방출되는 새까만 엔진오일의 처리 과정과는 무척 다르다.
이렇게 자연조화 디자인은 환경 보호에 대한 계몽의 단계를 거쳐 개인적인 실천, 그리고 기업 정책의 단계로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정책들 역시 자본주의 체제를 움직이는 ‘새로움’이라는 가치관을 중심으로 한 제품 미학이 변화하지 않으면 더 이상 실현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이 산업화 이후 스스로 길들여 온 욕망을 어떻게 조절하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이 지구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디자인 만의 과제가 아니다. 근래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인류는 새로운 별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괴된 지구를 떠나야 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하지만 이에 앞서 철저히 인공의 세계인 디지털 세계가 발전할수록, 자연 파괴의 위기감을 느낄수록 자연으로서의 인간은 현재의 생존을 위해 더욱 더 자연과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디자인을 추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김인철(국민대 테크노디자인 대학원장)inchul@kmu.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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