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天高馬肥(천고마비)

  • 입력 2000년 11월 7일 19시 44분


肥―살찔 비 熟―익을 숙 潤―기름질 윤 乘―탈 승 塞―변방 새 鞍―말안장 안 가을은 浪漫(낭만)이 낙엽과 함께 굴러다니는 계절이다. 봄처럼 아기자기하여 들뜨게 하지도 않고 여름처럼 왕성하여 지나치지도 않다. 그저 中庸(중용)과 完熟美(완숙미)를 느끼게 하는 계절,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봄을 ‘生動’의 계절, 가을을 ‘成熟’의 계절로 알았다.

자연히 고래의 많은 詩人墨客(시인묵객)들이 즐겨 가을을 노래했으며 여기에서 가을을 형용하는 말도 많이 등장하여 우리네 인생을 潤澤(윤택)하게 해 주고 있다.

그 중 하나에 ‘天高馬肥’(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가 있다. 이 얼마나 낭만이 넘치는 말인가. 그러나 같은 말도 듣는 이의 입장에 따라 차이가 나는 법. 天高馬肥를 결코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면 믿겠는가.

중국은 늘 북방 오랑캐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최초로 대륙을 통일한 秦始皇(진시황)이나 판도를 크게 넓혔던 漢武帝(한무제)도 이들에게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萬里長城의 출현도 이 것과 관계가 있다.

그들이 두려웠던 까닭은 말을 이용한 뛰어난 ‘기동력’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乘馬(승마)에 이골이 난 유목민족이 그렇지 않아도 움직이기를 싫어했던 농경민족을 상대하는 것은 속된 표현으로 ‘식은 죽 먹기’보다도 더 쉬웠다.

그들은 가을만 되면 남쪽을 호시탐탐 노렸다. 머지 않아 닥쳐 올 길고 긴 겨울을 대비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람처럼 몰려와서는 소리도 없이 쓸어가곤 했다. 자연히 중국의 북방 사람들에게 있어 天高馬肥만큼 끔찍한 것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가을이 被奪(피탈)의 계절이었던 것이다.

당나라 시인 杜甫(두보)의 할아버지에 杜審言(두심언)이 있다. 북방의 흉노를 막기 위해 出征(출정)하는 친구 蘇味道(소미도)에게 ‘贈蘇味道詩’(증소미도시)를 한 수 써 주었다.

雲淨妖星落(운정요성락) 구름은 여리고 별은 흩날리는데

秋高塞馬肥(추고새마비) 가을 하늘 드높고 새마는 살찌도다.

據鞍雄劍動(거안웅검동) 말안장 올라앉아 웅검을 휘두르며

搖筆羽書飛(요필우서비) 붓을 휘둘러 승전보를 전하리.

가을이 되어 塞馬가 살찌는 것이야 좋겠지만 그것이 오랑캐의 말이라면 반가울 리 없다. 그래서 인지 가을이 되어도 중국 사람들은 天高馬肥라는 말을 우리만큼은 즐겨 쓰지 않는 것 같다.

鄭錫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478sw@email.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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