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할리우드 재난영화에 도전한<리베라 메>

  • 입력 2000년 11월 9일 15시 55분


1998년 2월, 청춘영화 <짱>의 촬영을 마친 양윤호 감독은 TV를 통해 한 건의 뉴스를 들었다. 그건 부산의 한 신발공장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이었는데, 양 감독은 사건 자체보다 화재 현장의 뒷 이야기에 마음이 끌렸다. 경찰이나 군인에 비해 턱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소방대원들의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양윤호 감독은 이런 소재를 영화화하는 게 생각보다 훨씬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었다. 소방관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려면 불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고, 대충 뽑아본 제작비만도 수십 억 원이 넘게 들 것 같았다. 할리우드에선 이미 74년에 <타워링>(어윈 앨런 감독)같은 멋진 화재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국내에서 화재 재난영화가 만들어진 전례는 아직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리베라 메>는 개봉 시점으로만 보면 국내 화재영화의 '원조' 자리를 <싸이렌>에게 빼앗겼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져 개봉된 탓에 <싸이렌>과 여러 모로 비교되는 수모도 감수해야 했다.

처음 <싸이렌>은 <분노의 역류>에서 도시를 집어삼키는 공룡 같은 불을 만들어낸 할리우드 특수효과 팀을 수배했다는 점에서, 국내 특수효과 팀이 집도한 <리베라 메>의 '불'을 이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리베라 메>는 불 장면 하나만 따지면 '유서 깊은' 할리우드 화재영화의 노하우를 보기 좋게 눌렀다. 검게 그을린 회색 벽을 타고 흐르는 불덩이들, 사람보다 먼저 달려오는 위악적인 불의 질주는 <싸이렌>의 그것보다 훨씬 인상적이다.

<리베라 메>의 첫 장면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장중한 음악과 함께 시작된다. 소년 방화범으로 교도소에 갇혔다 12년만에 출감한 희수(차승원). 그가 출감하는 날 한 건물 보일러실에선 대규모 화재 사건이 발생하고, "그로부터 5년 후"라는 타이틀이 떴다 사라진다. 뭔가 큰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 "초반 5분 안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제1 수칙은 이 영화에서 철저히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헬기로 잡아낸 서울 시내 전경, 화재가 일어난 현장의 긴박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 첫 번째 화재 신은 본격적인 연쇄방화의 시작이다.

영화는 마치 군인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소방대원들의 모습을 스펙터클 하게 비춰준다. 스타급 배우들이 연기하는 소방대원들의 모습은 작은 움직임 하나만으로도 위용을 뽑아낼 만큼 멋지다.

단짝 소방대원의 죽음에 큰 빚을 진 듯 괴로워하는 상우(최민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배 소방관 때문에 진압 시 퇴로만 찾게 된 겁쟁이 소방관 현태(유지태), 아직 장난기가 가시지 않은 젊은 소방대원 준성(정준), 동료애와 가족애가 투철한 쌍둥이 아빠 한무(박상면), 불에 대한 앙심이 남아 있는 도끼(김수로) 등.

이들 중 영화의 초반 흐름을 주도하는 인물은 상우와 현태다. 언제나 꽁초가 타들어 갈 만큼 깊숙이 담배를 피워 대는 상우는 첫 번째 화재 진압 이후, 이번 사건이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방화에 의한 화재임을 눈치챈다. 불의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않았다는 걸 감지한 후 방화라는 심증을 굳히게 된 것. 상우의 연인이자 화재 조사반 여직원인 현민성(김규리) 역시 이 화재가 방화에 의한 것임을 일찍 간파한다.

화재가 연발하는데도 쉽게 증거를 잡을 수 없었던 두 사람에게 결정적인 슬픔을 안겨주는 사건은 현태의 죽음이다. 방화범은 상우에게 "날 방해하지 말라"는 전화 메시지를 남긴 후 현태의 집에 불을 지른다.

첫 장면에서 희수의 출감 모습을 지켜봤던 관객들은 이 사건이 방화에 의한 화재이며 사건의 진범이 누구라는 사실까지 짐작할 것이다. 범인을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은 미스터리 스릴러 구조를 차용한 영화로서 분명 위험한 도박이다. 하지만 <리베라 메>는 범인의 캐릭터에 신비로운 카리스마를 덧입히는 것으로 치명적인 위험에 대비했다. <쎄븐>의 케빈 스페이시처럼 독창적인 범인 캐릭터를 창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흔적이 영화 곳곳에 배어있다.

아이들에겐 천사처럼 다정하고 불 앞에선 비운의 악마로 변하는 남자. 그는 학대받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아이들의 집에 연쇄방화를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설정은 사실 좀 진부하지만 방화를 저지른 범인의 개인사가 분명하기에 억지스러운 느낌은 덜하다. 그렇다고 <리베라 메>가 탄탄한 이야기 구조를 확보한 잘 짜여진 블록버스터라는 뜻은 아니다. <리베라 메>는 화려한 불의 움직임을 잡아낸 솜씨 만큼 드라마를 탄탄히 쌓아올리지는 못했다.

그것은 소방대원 각각의 캐릭터에 신선한 생기를 불어넣지 못한 이유가 크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는 뛰어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 적당한 수준이지만, 소방대원들의 갈등과 연쇄방화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드라마의 이음새는 튼실하지 못하다.

상업적인 블록버스터 안에 뭔가 의미 있는 메시지를 담아보려는 양 감독의 욕심도 지나쳤다. 동료 소방대원이 부상을 당한 후 한무가 "다친 것도 억울한데, 왜 소방대원은 자비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지"라며 울부짖는 대목은, 그 자체론 의미 있는 발언이지만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소방대원을 지나치게 미화시킨 것도 이 영화의 맹점 중 하나. 비번인 한무가 가족과의 외식 길에 화재 현장을 만난 후 "아빤 소방관이야"라고 말하며 현장으로 달려나가는 장면은 영화의 드라마틱함을 보강하려는 강장제 이상은 아니다.

초반 화재 장면이 너무 길고, 언제나 분위기만 잡는 상우와 겁쟁이 현태의 갈등이 화재 현장에서 너무 길게 이어지는 것도 현실성을 떨어뜨리는 부분 중 하나.

45억 원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치고 영화의 뒷마무리도 깔끔하지 못했다. 희수가 화재 현장 담벼락을 타고 걸어가는 장면에서 붐 마이크 그림자가 얼핏 보이는데, 이런 사소한 실수는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리베라 메>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멋지게 흉내냈지만, 청출어람의 진가를 발휘할 만큼 뒷손질을 잘 하지는 못했기에 허전해졌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