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나의 로시난테에 박차를 가해야 할 때가 온 것을 느낍니다. 방패를 챙겨들고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가끔은 20세기의 난폭한 모험가인 이 못난 아들을 기억해 주시겠지요.… 모두 사랑합니다.”
◇'성과'에 머물지 않은 혁명가◇
그는 다음해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와 게릴라전을 이끌다가 1967년 10월9일 볼리비아에서 생포돼 서른아홉의 나이로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는 ‘20세기 최고의 혁명가’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 됐다. 혁명의 ‘성과’에 머물지 않고 언제나 혁명의 ‘길’에 서 있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길은 선택이다. 선택하지 않은 길은 그저 여백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 사람에 뒤덮이고 길과 건물로 가득 찬 도시에서는 길도 여백도 찾기 어렵다. 그저 사람들이 흘러다니는 곳을 따라다니다 하루를 마치기 십상이다. 사람들이 떠난 한밤중의 텅 빈 거리를 보면 그 길의 주인은 ‘나’도 ‘너’도 ‘길’도 아닌 이름 없는 군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눈앞에 있으면서도 먼 길◇
그러나 복잡한 서울 한복판에도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두서넛이 담소를 즐길 수 있는 정동길, 짧은 사색에 잠길 수 있는 덕수궁이나 경복궁의 돌담길, 나무 사이에 몸을 담글 수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공원길, 그리고 군중 속에서 ‘나’를 찾는 잔인한 연습이 가능한 종로….
길의 선택이 어려운 것은 그 길의 끝에서 만날 목적지를 미리 걱정하기 때문이지만 체 게바라처럼 그 길 자체와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길 대신 사회의 정치경제적 모순을 치료하는 길을 택했던 스물여덟살(1956)의 아르헨티나 출신 젊은 의학도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에 뛰어들며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진정한 길(道)은 주체와의 철저한 합일을 요구한다. 이 길은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고 했을 만큼 매력적인 길이지만, 모든 사적 욕망의 포기를 선택할 때 다다를 수 있기에 바로 눈앞에 있으면서도 아주 먼 길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게 뭘까"◇
도에 이르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일정한 목적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가는 길에 하나의 ‘흐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에서는 빛과 그늘이 끊임없이 교차되는 것을 도(一陰一陽之謂道)라 하고 ‘노자(老子)’에서는 일정한 언어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을 도(道可道, 非常道)라 했다. 이 길과 합일을 이룬 자가 성인(聖人)이기에 그 성인은 곧 길이요 진리다. 하지만 인간의 일상적 욕망을 모두 포기해야 하기에 몹시 ‘비인간적’ 길이기도 하다.
지금,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이다. 올해의 이 길목은 세간의 어려움 때문에 낭만보다는 싸늘함이 살을 파고든다. 하지만 어두운 전망 속에 목적지가 안 보일 때, 오히려 짧은 이해관계를 떠나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기 좋은 기회다. 한두 해의 ‘목적지’보다 자신이 합일하고자 하는 인생의 ‘길’을 생각하면서, ‘나’의 선택에 맡겨진 ‘여백의 길’을 바라보며 부자 된 느낌!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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