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5월6일 위스콘신주 케노사에서 태어난 그는 처음 연극 배우로 엔터테인먼트 세계에 진입했다. 어린 시절 좌파에 매료됐던 그는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서 활동할 당시에도 반골 기질이 강했다. 정치적인 연극을 선보인 탓에 정부의 제재를 받았고, 이 사건 이후 동료 연기자인 존 휴즈먼과 함께 새로운 극단을 차려 독립했다.
머큐리 극단에서 활동하던 그는 곧 라디오로 영역을 넓혀 새로운 개념의 '라디오 쇼'를 만들어냈다. 극본을 줄줄 읽어 내려가는 딱딱한 드라마가 아니라 리얼리즘에 몸을 담근 생생한 드라마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후 RKO 스튜디오는 이 재능 많은 젊은 친구를 고용해 멋진 상업 영화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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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스튜디오의 꿈을 무참히 짓밟았다. 지금은 각종 여론 조사에서 '할리우드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 1위' 자리를 놓치지 않는 <시민 케인>(41)도 발표 당시엔 지독한 혹평을 면치 못했다. 신문계의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삶을 희극적으로 묘사한 탓에 허스트가(家)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허스트 소유의 신문들은 <시민 케인>에 악평을 퍼부었으며, 흥행 역시 별 볼 일 없었다.
차기작인 <위대한 앰버슨가>(42)도 스튜디오와의 불화 때문에 '불구적인 영화'가 됐다. 스튜디오는 140분 짜리로 편집된 이 영화의 러닝타임을 88분으로 잘라 버렸으며,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꿨다. 개봉 후 이 영화가 비평 및 흥행 면에서 모두 실패를 거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후 할리우드에서 <공포로의 여행>(46) <이방인>(46) <상하이에서 온 여인>(48) 등을 연출한 그는 <맥베스>(48)를 끝으로 음모와 모략이 떡고물처럼 버무려진 할리우드에 냉정히 등을 돌렸다.
스튜디오의 지독한 간섭에 혀를 내두른 그가 새롭게 터전을 잡은 곳은 유럽. 그는 유럽 각국에서 다시 예전처럼 감독 대신 배우의 삶에 열중했다. 영국 최고의 걸작으로 추앙 받는 캐롤 리드 감독의 <제3의 사나이>(49)에 출연한 것도 바로 이 무렵.
그러나 끝내 연출가의 꿈을 접지 못했던 그는 할리우드 바깥에서 <오셀로>(52) <아카딘씨>(55) 등의 영화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그후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와 <악의 손길>(57)을 연출한 그는 이 영화의 흥행 실패로 72년 <바람의 저쪽>을 연출할 때까지 약 15년 동안 메가폰을 잡지 못했다.
천재의 삶은 정말 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일까.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버지니아 니콜슨, 리타 헤이워드, 파올라 모리와의 결혼도 속전속결로 끝내버린 그는, 10월10일 심장마비로 외롭게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웰즈가 청년 시절을 보냈던 영국 론다에 안장되어 있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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