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이 많다. 만화엔 여러 모로 인간보다 나은 짐승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 짐승들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을 처단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자고로 인간과 가장 친하게 지내온 짐승은 개. 그 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품종은 동작이 민첩하고 날렵한 자태를 자랑하는 도베르만이다.
<네오 도베르만>은 서울문화사에서 나온 시미즈 레이코 걸작선 4권 <천녀의 방문>에 수록된 단편이다. 시미즈 레이코는 <달의 아이>와 <월광천녀>등 주로 신화와 전설을 모티브로 한 기발하고 초현실적인 작품들을 그려왔다.
어린 소녀인 유리카는 어느 날 괴한들에게 쫓기는 작은 강아지를 구해 집으로 데려온다. 세월이 흐르자 강아지는 장성하여 혈기왕성한 숫컷 도베르만이 되고 여고생이 된 유리카는 외국에 계신 부모와 떨어져 지내게 된다. 유리카는 도베르만에게 쇼너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펫샵 오브 호러즈>는 아키노 마츠리의 장편으로 현재 서울문화사에서 6권까지 출간되어 있다. 뉴욕 차이나타운에서 괴상한 애완 동물가게를 운영하는 D백작이 주인공으로 <드라이첸>은 그 중 4번째 에피소드이다. 아키노 마츠리 역시 시미즈 레이코와 마찬가지로 세기말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주로 그려왔다. 엄마 아빠가 괴한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충격 때문에 일시적으로 실명한 소녀 카렌은 D백작의 가게에서 맹도견을 구입한다. 도베르만인 그 맹도견은 드라이첸(dreizehn:독일어로 13)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쇼너와 드라이첸은 도베르만이지만 놀랍게 때때로 인간의 모습을 한다. 쇼너는 어떤 때는 도베르만의 모습이다가 다른 때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온다. 드라이첸은 분명 도베르만이라며 소개되지만 시종일관 인간의 모습으로 나오다가 마지막 순간에 도베르만으로 변한다.
이들은 인간의 모습일 때도 도베르만의 특징을 그대로 지닌다. 훤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킹카가 되는 것. 검은 머리에 어울리게 옷도 늘 세련된 디자인의 검은색을 입는다. 헤어스타일은 좀 달라서 쇼너는 반곱슬 머리지만 드라이첸은 스트레이트다.
유리카의 집에 놀러온 한 친구는 인간 '쇼너'를 보곤 "왕 슈퍼 울트라 캡 꽃미남"이라며 유리카의 애완견을 애인으로 착각한다. 드라이첸의 외모는 더 근사하다. 길을 걷다 드라이첸을 본 카렌의 친구는 "날카롭고, 지적이고 게다가 무척이나 섹시해"라며 드라이첸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카렌의 궁금증을 자극한다. 가늘고 섬세한 펜 선이 특징인 시미즈 레이코와 아키노 마츠리는 쇼너와 도베르만을 부끄럽지 않은 꽃미남으로 그려낸다.
이 도베르만들은 어째서 인간의 모습이 될 수 있는 걸까. 쇼너의 경우 그 답은 출생의 비밀에 있다. 어느 미치광이 과학자가 인간의 수정란과 도베르만의 수정란을 결합해서 둘 사이를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쇼너를 만들어 낸 것이다.
황당하긴 하지만 쇼너가 나름대로 명쾌한 근거를 가지는 반면 드라이첸은 좀더 모호하다. 분명 카렌이 실명 상태인 동안 드라이첸은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게다가 말도 한다. 하지만 주변인물들은 모두 도베르만 드라이첸이 인간으로 나오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마지막에 카렌이 시력을 되찾고서야 드라이첸은 개로 표현된다.
<펫샵 오브 호러즈>의 다른 에피소드를 보면 D백작이 파는 애완동물은 주인에게 그들이 가장 갈구하는 모습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드라이첸이 남자로 표현된 것은 실명 상태의 카렌이 간절히 원한 것이 자신을 지켜줄 멋지고 강한 남자였기 때문일까.
도베르만은 대개 사냥용이나 군용, 방범용으로 훈련된다. 그래서 쇼너와 드라이첸도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 때문에 위기에 처한 주인을 구출하는 걸로 본분을 다한다. 쇼너는 미치광이 박사에게 자신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로 잡힌 유리카를 구해 낸다. 탈출 중에 유리카는 쇼너에게 사랑을 고백하고(물론 인간 상태일 때),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둘은 키스 장면을 연출해 독자에 대한 서비스정신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드라이첸은 유산을 노리고 카렌을 살해하려는 친척에게 달려들어 총상을 입고 그녀를 지킨다. 늘 자신에게 딱 달라붙어 주의를 소홀히 하지 않는 드라이첸이 불만스럽던 카렌은 그 사건을 계기로 드라이첸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리하여 여기서도 검은 머리 미남과 금발 소녀라는 순정만화의 커플 공식이 다시 한번, 개와 인간이라는 변형으로 반복된다.
사람들은 애완동물에게 정을 주고 외로움을 달랜다. 그런 점에서 홀로 사는 가냘픈 소녀가 강하고 멋진 도베르만에게 애착을 갖는다는 것은 제법 일리가 있다. 만화를 보다보면 도베르만 한 마리를 갖고 싶은 맘이 굴뚝 같지만 알다시피 도베르만은 차 한대 값을 훌쩍 뛰어넘는 귀한 신분이다. 게다가 매일매일 다량의 살코기를 바쳐야한다니 킹카 도베르만을 모시는 건 근사한 남자를 만나는 것 못지 않게 어려운가보다.
이재연 <동아닷컴 객원기자> >skiola@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