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수필이란 말은 멋이 없다. 일어 번역이라 그럴 것이라 짐작해 본다. 이태준 같은 멋쟁이는 그것을 무서록(無序錄)이라고 했다. 풀어쓰면 '순서 없이 쓴 글'이 될 텐데, 역시 그다운 어법이라 마음에 든다.
겨울이었다. 방안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딸아이가 울면서 뛰어 들어온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해님이 얼어붙어 부서지고 있어요, 아빠!"
창문을 열어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딸아이는 남쪽 지방에서 살아서 눈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런 엉뚱한 상상을 했나 보다.
"처음에는 흰 꽃들이 날아 다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입에 대보니 꽃잎도 없고 맛도 없고, 그리곤 다 없어져버렸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눈(雪)'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짧은 글의 서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식(女息)의 동심이 눈처럼 희게 그려져 있다.
이 책엔 유난히 동심을 다룬 글이 많다. 어른이 되면 잃어버리게 되는 것. 그걸 '지혜'라 불러보면 너무 엄숙해질까? 아이 때 배워둔 지혜는 평생 삶을 헤쳐나가는 힘이 된다. 지혜는 짧게 빛나지만 오래 마음에 남는 우화 같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찻잔을 유리잔으로 바꾸었다. 단순한 모양이었지만 커다란 데다가 투명해서 차를 넣고 물을 부으면, 녹색의 운무가 퍼지는 듯 차 색깔이 우러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또 잘 말라 작게 몸이 말려 있던 잎들이 하나 둘 몸을 푸느라 꼼지락대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술을 끊으면서 차를 즐기게 됐다는 저자의 '찻잔 순례기' 중 한 대목이다. 꼼지락대며 더운 물에 몸을 푸는 찻잎이 눈에 선하다. 사물을 보는 팽팽한 긴장 없이는 나오기 힘든 표현이다. 글을 쓰다 생각이 끊기는 게 싫어 큰 찻잔을 구하러 다녔다는 사연도 웅숭깊다.
이처럼 지혜와 응시는 이 책의 두 가지 미덕이다. 좀더 똑똑해지기보다는 넓어지며, 날카로워지기보다는 깊어지는 느낌이다. 행간마다 놓인 여백을 음미하는 것도 즐거움의 하나.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서양의 '에세'와 '순서 없이 씌어진' 동양의 수필 사이에 가로놓인 간격을 느낄 수 있다.
모두 6장으로 편집된 이 책은 자핑아오의 대표 산문만을 모았다. 저자는 1997년 프랑스 여성평론가협회 외국문학상(페미나상)을 받았다. 이 책에는 산문 외에 저자의 단편 소설 두 편도 덤으로 실려 있다.
안병률 <동아닷컴 기자>mokd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