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출판통신/도쿄에서]거물 사학자의 '일본' 신화깨기

  • 입력 2000년 12월 1일 20시 00분


아미노 요시히코는 일본의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거장 사학자이다. 그의 전공 분야는 일본 중세사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일본사 전체의 틀을 검토하고 다시 고쳐 쓰는 일에 정열을 기울이고 있다. 이 책은 아미노가 지금까지 쌓아 왔던 학문적 성과를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명성을 날렸던 대가들이 노년에 쓴 개설서는, 자칫하면 따분하고 지루해지기 쉬운 법인데, 이 책은 대단히 야심적이고 모험정신에 넘치는 저작이다.

아미노는 지금까지 일본사가 자명한 전제로 삼아 왔던 틀 자체를 근본부터 다시 검토한다. 그는 먼저 이른바 ‘진보사관’을 점검하는 작업부터 시작해 과연 인간이 야만에서 문명이라는 단선적인 진보의 길을 따라 왔던 것인가를 비판한다.

아미노가 비판의 중요한 대상으로 삼고 있는 다른 하나는, 이른바 ‘농민중심사관’이다. 지금까지 일본사에서는 ‘학쇼(百姓)’라고 하면, 오직 벼를 심는 정주(定住) 농민만을 가리켜 왔다. 그렇기 때문에 어민, 직인(職人), 산민(山民), 상인, 방랑하는 예능인, 피차별민, 여성, 어린이, 노인 등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이와 관련해, 아미노는 북방의 아이누 민족과 남방의 류큐(琉球) 왕국이 동아시아 전역에 걸치는 해양 교역에 종사해 왔다는 점에 특히 주목한다. 수렵 채취민이었던 아이누는 미개사회에 갇혀 살았던 것이 아니라, 북방의 바다를 자유롭게 왕래하는, 굉장히 다이나믹한 교역넷(net)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또한 아미노는, 지금까지 당연하고 확실하게 여겨 왔던 ‘일본사’의 이미지는 근대에 만들어진 국민국가의 상(像)을 과거에 그대로 투영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라고 단언한다. 일본은 태고적부터 동질적이고 통일된 단일 민족국가라는 잘못된 관념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근대 이전까지는 동(東)일본과 서(西)일본은 매우 이질적인 사회원리에 기초를 두고, 각자 독자적인 개성을 가진 지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은 서부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군사적인 지배를 넓혀가는 형태로 성립되었으며, 동북 지방은 11세기까지만 해도 아직 그 지배 하에 들어 가지 않았다. 또 홋카이도와 오키나와가 ‘일본’이 된 것도 메이지시대 이후의 일이다.

‘일본’이란 이러한 방식으로 지배권을 확대시킨 국가의 국호였을 뿐이고, 또 그러한 국호가 정해진 것도 7세기말∼8세기초였다. 즉, 그 전에는 이 지구상에 ‘일본’도, ‘일본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배권 확대의 중심에는 ‘천황’이 있다고 아미노는 역설한다.

아미노는 국민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대단히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일본’이라는 동질적인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환상이며 신화이다. 아미노는 이 신화를 깨고, 다양성에 넘친 ‘일본사’의 모습을 구축하고, 그것을 그려내는 데에 힘을 쏟고 있다.

▽아미노 요시히코 지음/고단샤▽

이연숙(히토츠바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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