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디자인, 세상을 바꾼다]굿 디자인은 굿 비즈니스

  • 입력 2000년 12월 10일 19시 20분


짙은 안개 속에서 뿌옇게 깨어나는 런던의 아침. 수수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면도 자국 새파란 남자들이 유난히 깨끗한 셔츠에 수트를 입고 가죽 폴더를 낀 채 바쁘게 오가는 거리가 있다. 영국 경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런던의 시티거리. 이 지역의 석조 건물들에는 유수한 회사들이 들어서 있다. 여기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건물이 들어섰다. 1986년 세계 최고의 재보험 회사인 로이드가 보수적인 금융계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획기적인 건물을 지어 올린 것이다. 파리의 퐁피두 센터를 설계한 건축 디자이너 리차드 로저스의 작품답게 기발한 건물이었다.

밤이면 외관 전체에 파란 불을 밝히는 이 건물은 근처의 세인트 폴 성당이 보여주는 주황색 조명 속의 고색 창연한 분위기와 묘한 대비를 이루며 세계 최고 보험사로서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로이드는 전통만 자랑해 오던 금융사의 건물 이미지를 과감히 탈피, 전위적인 빌딩 디자인을 선택함으로써 자사의 혁신적인 전략과 미래 지향적인 변화 의지를 일반인에게 고취시킨 것이다. 이렇게 기업 철학을 시각적으로 수행하는 비즈니스 파트너, 이것이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말없는 세일즈맨’이다.

시각화되어야 하는 기업 정체성

‘행복한 왕자’를 지은 오스카 와일드는 “오직 어리석은 사람만이 겉모양으로 상대를 평가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겉모양을 기업에 적용하면 사옥에서 시작해 마크, 로고, 캐릭터, 유니폼, 차량의 색채와 디자인, 그리고 광고나 제품 브랜드까지로 확장될 것이다. 심벌 마크에서 포장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이미지 속에서 우리는 특정 기업의 경영 철학이나 내부 관리 능력, 혹은 대고객 서비스와 더불어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느끼게 된다.

◇삶의 스타일 결정짓는 기호 제품은 단순한 물건 아니다◇

이 가운데 소비자에게 직접 어필해 기업의 특성을 일깨워 주는 것이 바로 제품이다. 제품은 더 이상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을 결정짓는 하나의 기호(sign)다. 할리우드의 스타들이 마시는 물인 ‘에비앙’을 즐긴다는 것은 이 생수가 제시하는 이미지의 내용에 동참한다는 의미이다. 소비자는 기업이 제시하는 꿈과 스타일에 공감할 때 그 제품을 선택한다.

나이키의 디자이너 팅커 하트필드는 마이클 조던의 강한 파워와 승용차 페라리의 마크 형태가 지닌 역동적인 이미지까지 혼합해 새로운 농구화를 탄생시켰다. 그가 이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스포츠 세계의 팽팽한 경쟁과 승부욕, 연마된 기술이 지니는 아름다움이었다. 이제 조던은 스스로 브랜드가 되어 윈도우 이펙트를 창출하면서 헬멧이나 티셔츠 그리고 운동복 등 나이키 제품 전반에 걸친 이미지가 되고 있다. 하나의 이미지가 신발에서 전 제품 브랜드로 확장된 것이다.

브라운 사의 제품은 이름 하나로 세계 가전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이 회사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로고, 그리고 이 로고의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한 듯한 제품을 통해 우리는 브라운사의 경영 철학을 생활에서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주방용품 전문기구 알레시사의 사장은 “제품은 시(詩)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처럼 무엇을 은유하고 상징하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이 회사의 꿈이다. 항상 소비자와 뭔가를 교감하고자 애쓰는 듯한 이 회사의 유머스러운 디자인에서 우리는 비가시적인 경영철학을 가시적으로 만나보게 된다. 이 외에도 IBM이 위기를 맞았을 때 자신들의 변화 의지를 디자인으로 표출해 성공으로 이끈 점, 애플사가 IBM에게 위세가 눌렸을 때 스티브잡스의 ‘아이 맥’으로 컴퓨터 시장에 재도전해 성공한 점 등은 디자인이 곧 기업의 생존 의지이며 “굿 디자인은 굿 비즈니스”라는 말을 증거해주는 사례이다.

브랜드 이미지의 창조가 곧 경쟁력

◇전세계적인 기술 평준화 브랜드 이미지가 곧 경쟁력◇

전 세계적인 기술의 평준화에 따라 제품의 정확성이나 완성도는 이제 더 이상 경쟁의 주요 항목이 아니다. 제품의 이미지를 어떻게 어필시키느냐에 따라 상품은 창고에 쌓여 재고품이 되기도 하고 공급이 달리기도 한다. 지금까지 경영의 핵심은 마케팅이며 세일즈이고 관리였다. 또한 기업간의 차별화는 기술의 우위라든가 판매 전략의 다양화, 수치와 통계 위주의 결산 보고서, 탄력적인 인사 운영 등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이제 그런 방법만으로는 경쟁이 불가능해졌다. 기업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경영체질의 변화를 꾀해야만 하는 시점에 놓이게 된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이 새로운 국면에 대응할 것인가? 어디에 길이 있는가? 해답은 디자인뿐이다. 기업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제시하는 디자인을 통해 기업은 소비자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디자인에 기업의 비전과 방향을 분명하게 반영시키려면 디자이너는 정책 결정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가해야 한다. 디자이너가 기업의 비전과 의지를 깊이 인식하지 못할 때 이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디자인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외양은 내면의 숨길 수 없는 반영체이다.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시각적 선택 능력을 폭발적으로 증진시키고 있으며 이제 소비자는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에 걸맞는 것들을 스스로 선택한다. 한 예로 사이버 몰의 탄생으로 자동차 대리점의 수가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고 한다. 소비자는 더 이상 세일즈의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보고 판단하며 선택하는 능동적인 주체인 것이다. 기업은 자신만의 일관된 정체성을 소비자에게 보여주면서 자사 제품의 브랜드 이미지 창조에 총력을 기울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디자인이다.

전승규(국민대 테크노디자인대학원 교수)

1. 로이드 빌딩

2. 아이비엠 로고 2개 아니면 아이 맥

3. 브라운사 제품과 로고

4. 알레시 주방용품 ― 필립 스탁 레몬 스퀴즈

5. 나이키와 미이클 조던

6. CIP 트리

7. 디자인 경영 조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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