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용의 눈'에 먹칠한 유창혁 "거참"

  • 입력 2000년 12월 13일 19시 06분


유창혁 9단의 손길에 갑자기 힘이 쭉 빠진다. 중반 무렵만 해도 기운차게 놓여지던 바둑돌이 바둑판 위에 맥없이 툭툭 떨궈지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도 이미 승부에 대한 집착은 사라진 터. 그저 습관처럼 바둑돌을 옮기고 있었다.

12일 제5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대회 결승5번기 3국이 열린 서울 중구 삼성화재 본사. 유9단이 야마다 기미오(山田規三生) 8단에게 이미 두판을 이긴 상태에서 대국을 벌이고 있었다.

대국장 옆에 마련된 검토실에서는 150여수가 넘어가자 ‘반면 10집 차이는 불변’이라며 검토를 중단했다. 홍태선 8단은 “야마다 8단도 이런 바둑은 놓치지 않아”라며 “3대0으로 이기면 싱거우니까…”하면서 ‘절망’ 선언을 했다.

‘유9단이 돌을 던지겠구나’하고 느낌이 온다. 이윽고 유9단의 손이 반상 위를 휘휘 젓는다.

유9단은 재빨리 장면도로 돌아간다. 그리곤 장면도 백 1을 두드리며 탄식을 거듭한다.

“거참, 왜 이수를 깜빡했지.”

앞에 앉은 야마다 기미오 8단도 눈치로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몇가지 변화도를 놓아본 뒤에도 백 1이 아쉬운 듯 연신 그곳을 다시 두드려 본다.

“실전은 중앙에 백집이 거의 나지 않았는데 장면도처럼 두면 7, 8집은 나니까 백이 해볼만한 형세였다.”

[장면도]

백 1의 곳이 급소. 흑은 2, 4정도 밖에 둘 수 없는데 이 때 백 5로 이어 연결한다. 이 경우 흑의 우변 집은 실전과 별 차이가 없는데 백 중앙 집이 두툼해져 해볼만한 형세. 실전에서는 백이 2의 곳에 호구치자 흑이 1의 곳에 받았다. 이후 흑 ‘가’가 선수여서 중앙 백집이 형편없이 줄어버렸다.

초반 백의 포석이 좋지 않았다. 단단하고 야무진 흑에 비해 백은 어쩐지 엉성하고 허술했다. 근접거리에서 몇방 잽을 얻어맞아 실점한 백은 가드를 내린 채 카운터 펀치를 노리는 형세. 그리고 우변의 흑진으로 뛰어들었다.

검토실 기사들이 모두 백의 타개가 쉽지 않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었지만 유9단은 나름대로 자신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프로기사의 맹점이랄까. 유9단도 백 1의 수가 떠올랐지만 이 수가 얼핏 흑집을 굳혀주는 악수라는 느낌에 그냥 호구를 치고 말았다. 그저 하변만 깨면 만족이라는 생각이었지만 이게 안일했다. 마지막 ‘용의 눈’을 그려야 할 곳에 그만 먹칠을 하고 만 것.

복기가 끝나 바둑돌을 깨끗이 치우고 야마다 8단이 먼저 일어난 뒤에도 유9단은 10여초 정도 그대로 앉아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아쉬운 장면을 다시 생각하며 14일 열리는 4국에선 꼭 이기리라는 다짐을 하는 듯 했다.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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