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쪽이 넘는 이 책에서 다루는 만화영화는 ‘미녀와 야수’(1991) ‘알라딘’(1992) ‘라이언 킹’(1994) ‘인어공주’(1989) 등 고작 네 편. 전세계 어른들을 동심의 세계로 유인했던 ‘디즈니 르네상스 4인방’이다.
평생 이탈리아 철학 강단을 지켜온 저자는 여기서 풍부한 ‘인문학 콘텐츠’와 중요한 ‘철학적 화두’를 발견한다. 장면 하나, 대사 한 줄, 에피소드 한 가지에서 고대 플라톤으로부터 근대의 니체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의 역사가 누에 실 뽑듯 술술 풀려나온다.
예컨대 ‘미녀와 야수’의 여주인공 벨의 머리색깔이 금발이 아닌 짙은 갈색인 것은 전통적 여성이 가진 미의 기준을 의도적으로 위배하고 있다고 본다. 이는 여자가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독립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 주인공 야수 내면의 관대함과 냉혹함, 상반된 캐릭터의 콕스워스(시계)와 루미에(촛대)의 밀고 당김에서 헤겔의 ‘이중적 변증구조’를 발견한다.
‘알라딘’에서는 홀로서기에 노력하는 주인공의 성격에 플라톤과 마키아벨리의 ‘덕(德)’의 개념을 끌여들이며, ‘라이언 킹’의 주제는 정체성과 개인성이란 필터를 통해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저작과 연결시킨다.
저자는 이런 분석을 관념적인 책상물림으로만 보지 않는다. 보편적인 동화를 세심하게 읽다보면 서구인의 의식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스토리와 철학이 부재하고 기술만 있는 우리 애니메이션이 해외 진출을 위해 유념해야 할 대목으로 강조된다.
물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탈역사적, 탈사회적, 탈이데올로기적인 신화의 반열에 올리는 듯한 태도에 시비를 걸 수 있다. 디즈니가 어떻게 고전동화를 할리우드식 로망스로 변용했는가, 그리고 이것이 갖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에 대해 침묵하기 때문이다. ‘인어공주’의 경우, 원전의 비극적인 결말을 해피엔드로 뒤바꾼 것이 사랑과 신분상승의 연계성을 강조하는 왜곡이 아닌지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판이 ‘딴지’ 같아 보이는 것은 지적 포만감을 안겨주는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을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평이한 언어로 ‘번역’하는데 성공, 대중문화와 인문학을 가로지르는 넓은 강에 징검다리를 놓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학문적 엄정함과 대중적 관심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양서류적 글쓰기’야말로 ‘평론’이란 이름의 부박한 감상문이 넘쳐나는 요즘 대중문화 비평계에 쏘아올린 의미있는 꾸짖음 같다.
▽미녀와 야수, 그리고 인간/ 김용석 지음/432쪽 1만5000원/
푸른숲▽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