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이 시대의 대표적 선지식(善知識)으로 꼽히는 ‘북송담 남진제(北松潭 南眞際·한강 이북에는 인천 용화사 송담, 한강 이남에는 문경 봉암사 진제가 최고의 선승이라는 뜻)’의 바로 그 송담스님 맏상좌라는 사실. 83년 교통사고로 갈비뼈가 9개나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리하여 선승으로 살아갈 근기를 잃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쯤 송담스님의 법맥을 잇는 선지식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동지를 하루 앞둔 21일 팥죽을 끓일 솥을 들여놓는 등 잡사(雜事)를 일일이 챙겨야 하는 시골절의 평범한 주지일 뿐이다.
◇ 내년2월께 9~10권 분량 출간
―곧 평생 모은 선친의 자료집을 낸다면서요?
“선친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올 5월 1일에 맞춰 자료집을 낼 계획이었으나 결국 해를 넘기게 됐어요. 내년 2월경에는 나올 겁니다. 편집을 여러 곳에서 나눠하면 금방 끝냈을텐데 경비를 제대로 댈 수가 없었어요. 자료집이 9권이 될지 10권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새로 밝혀진 사실이 있나요?
“학자들은 새로운 게 많다고 하는데 너무 전문적이어서 잘 모르겠고…. 선친이 북한에서 처형된 날과 경위를 알게 된 게 제겐 큰 수확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선친이 사형선고를 받은 55년 12월 15일을 제삿날로 삼았는데, 바로 처형되지 않고 이듬해인 56년 7월 19일 총살됐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
◇ "선친은 56년 7월19일에 처형"
―어떻게 밝혀졌죠?
“소련의 KGB요원을 지낸 이노겐치 김은 ‘박헌영 사건이 터지자 북한에 들어가 진상을 조사했으며 미제 간첩이라는 혐의의 증거가 불충분해 처형을 막았다’고 증언했습니다. 선친을 측근에서 모신 박길룡씨 등은 ‘이듬해 스탈린이 사망하고 격하운동이 벌어지자 북한에서도 국내파 등이 중심이 돼 김일성이 동유럽을 방문한 사이 김일성 축출을 시도했는데 실패로 끝나고 급거 귀국한 김일성이 ‘그 리론가 어떻게 됐어’라며 그날 처형토록 지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서대숙 박사 등은 김일성이 귀국한 날이 7월 19일이라고 했습니다.”
―선친이나 다른 가족에 대한 기억이 있나요?
“주변의 얘기를 들어보면 제가 6번 정도 선친을 만난 것으로 돼 있는데, 이 중 두 번 정도가 아주 희미하게 기억납니다. 선친의 후손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큰어머니(박헌영의 첫째 부인 주세죽)의 딸 비비안나와 저뿐입니다. 누님은 90년대초 모스크바에서 만났고, 한국에도 모신 적이 있는데 말이 안통하니까 낯설게 느껴졌어요. 선친이 처형되면서 외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한 작은어머니 윤레나와 두 남매 세르게이와 나타샤의 생사는 알 수 없습니다.”
―선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
이 대목에서 스님은 말이 없었다. 출가한 중이라고 하지만 공산주의자의 아들로 반공시대를 살아온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9살의 어린 그의 손을 잡고 구례 화엄사로 데려간 한산 스님으로부터 선친에 대한 평가를 절대 하지 않도록 교육받았다. 이것이 시대가 바뀌고 환갑의 나이를 앞둔 지금까지도 말문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일까.
◇ '아버지 평가' 질문엔 말문 닫아
절에서는 인시(寅時·새벽 3시반에서 4시반 사이)에 예불로 하루를 시작한다. 절정에 이른 밤 기운이 쇠하고 낮 기운이 움트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동지는 한 해 중 인시와 같은 순간. 그가 올해 꼭 선친의 자료집을 내고 싶어했던 것은 동지처럼 기나긴 집착의 밤을 끝내고 진정 새해를 맞고 싶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평택〓송평인기자>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