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제가 신석정의 시를 읽어드린 일 기억나세요? 선생님보다 8년 연상이신 고향 마을의 선배,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시인 말입니다. 이 어른께서 1943년에 ‘흑석(黑石) 고개로 보내는 시(詩)’를 쓰셨잖습니까. 그게 바로 젊은 후배 시인 서정주에게 보내는 시였지요.
‘흑석고개는 어늬 두메 산골인가 /서울서도 한강/한강 건너 산을 넘어가야 한다든고/좀착한 키에 / 얼굴이 깜으잡잡하여/유달리 희게 드러나는 네 이빨이/오늘은 선연히 뵈이는구나/(…)’
암송해드리고 나선 별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그저 ‘석정 선생께서 미당을 참 잘 봤다’ 정도로 그치고 말았지요. 그 때 못다 드린 말씀 이제는 드릴게요. 선생님 웃음이요, 그토록 맑고 화안한 웃음이 세기를 넘어서 며칠 전까지 이 땅에 있었다는 걸 저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늘 말씀하셨지요. “나의 은사이신 석전 박한영 스님께선 웃음이 백점이셨어. 나는 물론이지만 춘원 이광수도 그 웃음에 반해 이 분한테서 머리를 박박 깎고 불교도가 되었단다.”
이 말씀은 1933년 무렵의 기억이셨으니 저로서는 그저 석전 스님의 웃음을 상상할 밖에요. 그러나 미련한 제 짐작으론 그 누구도 ‘미당의 웃음만한 건 없다’는 겁니다.
최근에는 기력이 달려서 소리내시지는 못했지만 그저 반가운 사람과 눈만 맞으면 빙그레 웃어 보이시던 그 모습, 누군들 그 웃음을 잊겠습니까. 파란만장한 역사의 시간을 헤쳐나오시면서, 혹은 통분하고, 혹은 질주하며, 혹은 영원과 현재를 화해시키려 수십 년 간 고투하셨던 선생님의 생애에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이 바로 그 웃음 아니겠습니까.
언어는 대체로 기억의 형식이지요.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와 관련해 긍정, 순응, 낙관…, 이런 말들이 있지요. 그런데 인간의 언어란 약속의 체계이고, 기획되는 측면이 있어서 불가불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당은 긍정주의자다. 미당에게는 모든 게 ‘괜찮다’. 미당은 현실에서 비켜 서 있다. … 그래서 긍정이라는 말도 나중에는 이상하게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싱긋 웃으시는 모습을 보면 이런 말들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알게 되지요.
세기를 넘어서는 웃음. 삶의 기쁨을 시간의 옷감 위에 수놓는 예술 중의 상예술! 선생님께서 이 땅에 남겨주신 가장 큰 선물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입니다.
선생님! 감사해요. 이제야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한다는 걸 알겠습니다. 부디 왕생극락(往生極樂)하옵소서.
윤 재 웅
(문학평론가 · 동국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