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사건만 아니었더라면…." 요즘 TV를 보면서 가장 억울하고 안타까울 사람은 바로 가수 백지영이 아닐까. 안타까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피울음이라도 쏟을 지경일 것이다. ‘그 일’만 아니었다면 각종 가요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고 다녔을 것이 분명한 백지영은 올 연말의 잔치판에서 쓸쓸히 빠져 있다.
올해 5월 2집 앨범을 발표하면서 '대시' '새드 살사''트라이앵글' 등을 연달아 히트시킨 백지영은 앨범 판매량도 50만장에 육박해 여자 솔로 가수 중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일찍부터 유력한 가수상 후보로 점쳐졌지만 연말 방송가에서 그의 모습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백지영은 이미 열린 골든디스크상, 서울가요대상 등의 본상 시상에서 모두 제외됐다. 30일을 전후해 열리는 가요대상 시상식을 앞두고 있는 방송 3사의 최대 고민도 백지영을 10대 가수에 포함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였다. 방송 관계자들은 이번 일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터진 '사고'이고 그녀에 대한 동정론이 확산되고 있는 상태에서 도덕적인 잣대로 '후보 배제'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공통된 입장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지금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방송사 이미지에는 물론 백지영 자신에게도 도움될 게 없으리라는 생각에서 한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MBC에서 백지영을 10대 가수로 선정한 것으로 알려져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MBC는 갤럽에 의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그 결과에 따라 10대 가수를 선정했는데 이 조사에서 백지영은 조성모, god, 핑클 등과 함께 30세 이상, 30세 미만이 선정하는 10대 가수 두 부문에 모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MBC측은 결과가 나오자마자 백지영측에 이를 통보하고 출연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MBC 신종인 예능국장은 "연말 가요상 후보는 팬들의 뜻에 따른다는 방침에서 갤럽에 의뢰했고, 팬들이 백지영을 선정한 만큼 비디오 파문과 관계없이 상을 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수상 소식을 전해들은 백지영도 매우 기뻐했다고는 하지만 참석 여부는 미지수. 기획사측에서는 '자숙하는 의미에서 상을 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지만 MBC 쪽에서는 '아직 협의중'이라고 이야기한다.
신국장은 "어쨌든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이므로 자숙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여서 우리로서도 고민이 많다. 연말의 마지막 시간에 기분 좋게 봐야 하는 프로그램인데, 시청자들의 기분을 언짢게 하는 건 아닌지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비해 KBS와 SBS는 백지영을 가요대상 후보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을 최근 확정했다. KBS의 경우 자체 선정위원회에서 후보를 선정하는데, H O T의 경우 강타가 실정법을 위반한 만큼 수상 후보에서 제외한다는 쪽으로 일찌감치 결론이 났다. 그러나 백지영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의를 빚은 것은 사실이나 사생활에 해당하는 만큼 괜찮지 않느냐’는 동정 의견이 많았던 것.
동정론`-`자숙론 공방… 31일엔 ‘굿바이 콘서트’
KBS 예능국의 오세영 차장은 "공영방송의 특성도 있지만, 백지영 자신을 위해서도 당분간은 잊힐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을 줘서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투표를 통해 제외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SBS는 백지영을 제외한 이유로 "현재 활동이 가능하고, 시상식에 참석해 공연할 수 있는 가수에 한해 선정한다"는 방침을 들었다.
그동안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들이 시간이 지나면 슬그머니 다시 방송에 나와 활동하는 것을 보면 백지영의 '컴백'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듯하다.
지난해 성체험 고백서로 파문을 일으켰던 서갑숙은 라디오 진행자를 맡았고, 무면허 음주운전 사고를 냈던 탤런트 김지수는 불과 한달 여 만에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잇달아 캐스팅되어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욕설 파문의 탤런트 박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으며, 대마초 흡연으로 구속됐던 신동엽도 오락 프로그램의 MC를 맡아 예전과 다름없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시청자들은 “돈만 되면 상관없다는 제작진의 태도가 연예인들의 자숙보다는 방종을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가요대상 후보 선정에 앞서 MBC의 ‘일요일 일요일밤에’ 제작팀은 백지영을 이 프로의 한 코너인 ‘게릴라 콘서트’에 출연시킬 계획을 세우고 섭외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보도가 나가자 방송사 홈페이지 게시판은 사실 여부를 묻는 의견과 찬반논란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부끄러울 것도 숨을 것도 없다. 당당하게 나서라”는 지지 의견이 있는가 하면, “이 기회에 시청률이나 올려보자는 속셈”이라는 비난의 소리도 높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 프로젝트는 무산됐다.
백지영 문제를 보는 일반의 시각은 분명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인터넷 상의 논의도 백지영을 이해하고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일종의 질병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인터넷 상에 ‘백지영 살리기 운동본부’가 발족하고 팬클럽 회원들이 만든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격려성 발언이 쏟아진다.
뒤로는 즐길지언정 앞에서는 점잖은 태도를 취해야 했던 구세대들과 달리 N세대 팬들은 ‘매춘도 아닌 사생활을 가지고 뭘 그러느냐’는 입장이다. 문제의 비디오에 대해서도 ‘공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탈선행위’에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로 인식하는 경향이 커졌다. 따라서 당장 가수 활동을 재개하고 방송에 출연해 상을 받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백지영에 대한 논의는 ‘동정론’과 ‘자숙론’이 일대 격전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미디어평론가 변정수씨는 “실정법을 위반한 연예인들과 백지영의 경우는 명백히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성명까지 내면서 백지영을 옹호한 여성민우회측은 “선정적으로 문제를 확산시킨 미디어가 가장 문제지만 백씨에게 전혀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일으킨 사회적 파장으로 볼 때 한동안 자숙의 시간을 갖고 활동을 자제하는 등 납득할 만한 행동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지영은 12월31일 센트럴시티 밀레니엄홀에서 열릴 자신의 콘서트를 위해 맹연습 중이다. 이번 무대는 “팬이 한 명만 남아도 가수활동을 계속하겠다”던 그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공연 제목도 애초 ‘리듬 샤워-백지영 콘서트’에서 ‘굿바이 콘서트’로 이름을 바꿨다. 본인에게도 힘들고 괴로웠던 모든 일들과 ‘굿바이’하고 새출발하는 자리가 되길 바라기 때문일까.
<신을진 기자happyend@donga.com > (주간동아 2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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