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대립 대신 문명충돌 우려
유엔은 2001년을 ‘문명간 대화의 해’로 결정했다. 이슬람권의 영향력 있는 정치가이자 종교지도자인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이 유엔에서 2001년을 ‘문명간 대화의 해’로 정할 것을 제안했고, 회원 국가들의 전폭적 지지로 이 안이 채택된 것이다.
이미 2000년 G7, G8 등 세계 정상들의 모임과 세계 종교지도자의 모임에서도 동서문명의 대화와 협조가 논의됐다. 4월에는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에서 ‘문명간의 대화’를 주제로 대규모 국제회의가 열린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서구에서 도입된 민주주의와 동아시아 전통의 상호보완을 논의하는 학술회의를 10월 개최할 예정이며 인류 공동의 가치를 논의하는 국제적 포럼도 계획하고 있다.
유엔이 올해를 ‘문명간 대화의 해’로 정한 것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계기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급속히 약화된 대신 문명간 충돌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새로운 요인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이미 무력화된 1996년 미국 하버드대 새뮤얼 헌팅턴 석좌교수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저서에서 기독교와 이슬람문명권의 대립과 갈등이 냉전 이후 국제관계의 주요 문제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미래설계 위해 서구-비서구 합심
현재 이슬람권은 서방세계가 자신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미국을 중심으로 결속을 꾀한다는 불만으로 가득차 있다. 이슬람권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둘러싼 국제적 역학관계, 걸프전으로 표출된 이슬람권과 기독교권의 복잡한 이해관계, 미국의 국내정치 문제와 이라크 공습 연관 의혹 등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한편 아시아국가에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화에 대한 강한 반발과 거부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교통 통신의 발달과 국제금융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국경과 민족의 역할이 약화되고 있고, 지구상 각 지역에서 고립적으로 발전해 온 문명은 서로 소통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설계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유엔의 ‘문명간 대화의 해’ 사업 주무기관으로 선정된 유네스코는 1997년부터 문명간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인류 공동의 가치를 찾기 위한 작업을 추진해 왔다. 이른바 ‘보편윤리’를 제정하는 일이다.
▽'인권선언'대신할 '윤리강녕'준비
유네스코는 1997년 3월부터 파리 본부, 나폴리, 베이징, 서울 등을 돌며 관련 학자 100여 명이 참여하는 학술회의를 열어 ‘보편윤리’를 만들기 위한 의견을 수렴해 왔다. 이는 유엔이 현재의 ‘세계인권선언’(48년 제정)을 보완하는 새로운 ‘윤리강령’을 채택하기 위한 준비작업이기도 했다.
유네스코는 이 성과를 1차적으로 종합해 1999년 9월에 보고서와 함께 ‘21세기 윤리를 위한 공동의 틀’이라는 초안을 만들었다. 여기에서는 21세기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윤리의 기본 원칙으로 △자연의 자생능력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에서의 자연 이용 △권리와 책임의 자유로운 행사에서 인간의 자기 실현 △개인과 공동체의 상호보완 △정의에 기초한 평화 등을 제시하고 있다.
문명간의 소통을 위한 보편적 윤리와 가치의 추구는 이제 세계 지성인들의 과제가 되고 있다. “21세기는 윤리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종교와 민족간 대립 등으로 가치관 혼란이 심화되자 그 대안을 모색하는 일이 인류의 시급한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2001년, 인류는 20세기에 저질렀던 잔인한 갈등과 대립과 전쟁의 역사를 반성하며 문명 간의 대화를 통해 공존과 화합의 길을 찾아나서야 할 시점에 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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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찬기자>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