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필사본 내용
‘화랑세기’는 신라의 문장가 김대문이 7세기말 편찬한 화랑에 관한 전기로 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문제의 필사본은 1930∼40년대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일하던 박창화라는 인물이 베껴 적은 것. 1989년 부산에서 발견된 32쪽짜리 발췌 필사본과 1995년 공개된 162쪽짜리 필사본 두 가지가 있다. 540∼681년 화랑의 우두머리였던 풍월주 32명에 대한 전기를 담고 있다. 화랑의 남녀관계 근친혼 처첩관계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매우 충격적이다.
▽진위논란
필사본에 대한 진위 양론은 팽팽하다. 대부분의 고대사학자들은 “그런 문란한 성으로 가족과 국가가 유지될 수 없고, 삼국사기에 나타난 화랑의 모습과 큰 차이가 나며, 수록된 향가 역시 가짜”라는 이유로 위작(僞作)이라고 보고 있다. 반면 이 교수는 “선입견과 유교적 시각에서 신라의 성문화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신라인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면서 “화랑을 순국무사(殉國武士)로 보는 도식에서 벗어나야 하고, 2차 사료인 ‘삼국사기’와 차이가 난다고 해서 위작이라고 보아선 안되며, 수록 향가 역시 진짜로 확인됐다”고 주장한다.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이야기’의 내용
이 교수는 이 책에서 필사본을 토대로 신라인의 다양한 삶과 문화, 정신세계를 흥미롭게 복원해 놓았다. 화랑들과 그 주변의 놀랄 만큼 개방적인 성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신라 법흥왕의 신하 비량공은 왕비를 사모했다. 왕은 왕비와 신하의 만남을 막지 않았다. 신하와 왕비 두 남녀는 왕비의 뒷간에서 정사를 즐겼고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으니 그가 신라의 대표적 화랑인 사다함이었다.’
‘신라 사람 미생은 색을 탐해 돌아다니다 당두의 집을 찾아가 그의 처와 관계하곤 당두의 처를 첩으로 삼고자 집으로 불렀다. 그러자 미생의 누나 미실이 이를 알고 미생을 나무랐고 미생은 여인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 여자가 미생을 잊지 못해 스스로 미생을 찾아왔다. 여인은 미생의 아들 셋을 낳았고 이들을 당두의 아들로 삼으니,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아름답다 하였다.’ 이 교수는 “신라인들의 남녀 혼인관계야말로 신라의 골품제도 왕위계승 등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최근 신라유적 발굴 결과와 필사본 내용의 합치점을 찾아 경주 포석정이 유희의 공간이 아니라 사당이었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전망
학계는 대체적으로 이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을 참고하거나 인용하는 연구가 하나 둘 나오고 있다. 이는 ‘화랑세기’ 필사본의 내용을 신뢰하는 경향이 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교수는 현재 일본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화랑세기’ 원본을 추적 중이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